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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지하 회고록 '나의 회상, 모로 누운 돌부처' <1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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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지하 회고록 '나의 회상, 모로 누운 돌부처' <119>

그 겨울

1963년 겨울.

그 겨울 나는 원주에서 꼼짝하지 않았다. 그 겨울 나는 원주의 한 다방에서 시화전(詩畵展)을 열었다. 현실과 몽상, 과거의 어두운 기억과 미래에의 판타지, 모더니스트적이거나 슈르적(的)인 것과 민족적이고 민요적인 것이, 국가적 현실에 대한 날카로운 비판과 의식의 황홀에 대한 깊은 집착이 두서없이, 참으로 무질서하게 마구 엇섞이고 흑백적(黑白的)인 요소와 무지개적(的)인 요소가 이리 저리 엇갈리는 이른바 '혼허(混虛)'의 시화였다.

매일 밤 마시던 술잔 가까이 세 사람이 늘 있었다. 시인(詩人) 마종하(馬鍾河)와 주먹 손창성과 요염한 천주학쟁이 로싸였다.

그 겨울을 나는 조폭적(組暴的)인 삶의 폭력성과 스테인드글라스의 그 형언(形言)키 어려운 아름다움의 모자이크 사이에 일어난 일시적인 콤비네이션으로 기억한다. 천주학, 즉 가톨릭에 대한 깊은 관심이 그 무렵의 나의 정신적 중심을 어둠컴컴한 성당(聖堂) 안의 저 촛불 혼자 외로이 타오르는 제단(祭壇)으로 이끌고 있었기 때문이다. 가리누스, 신학생(神學生) 김육웅이 내 삶 안으로 들어온 것이 그 때다.

우리는 밤을 새워서 우주의 기원과 인간의 구원에 대해, 사회의 변혁과 영혼의 정화(淨化)에 대해 토론하고 토론했다. 밤을 꼬박 새우고 잎담배를 신문지에 말아 피우며 맞이하던 조그마한 만종의 그 시골집 창문밖의 푸르스름한 여명이 어쩌면 밤을 새운 우리들 토론과 고민에 대한 대답인지도 몰랐다.

걸어서 걸어서, 공복의 새벽길을 그 멀고 먼 홁길을 걸어서 걸어서 변두리 만종으로부터 원주 시내로 돌아오면서 가리누스는 이렇게 예측했다.

"김형은 언제인가는 모르지만, 그 언젠가는 가톨릭으로 입신할꺼요. 유물주의자는 그 유년기의 특징이 김형과는 판이하게 다릅니다. 불교래도 좋아요. 유물주의자는 김형 나이에 우주의 기원이나 영혼의 정화(淨化)같은 데에 관심이 없어요. 현실의 모순을 찾아내고 그것을 극복하든가 아니면 타협하려 들지요. 그나저나 김형은 괴로움이 많을 거예요. 일찌감치 신(神)에게 귀의하는 길을 한 번 적극적으로 생각해보세요."

"야 이 씨팔놈아! 난 널 친구로 좋아한단 말이야. 이 씨팔놈아!"
주먹 손창성의 술주정이다. 로싸를 통해서 관능과 금욕(禁慾)이 얽히는 죄스러운 기도, 그레이엄 그린의 저 '권력(權力)과 영광(榮光)'의 세계에 매혹되면서 맑은 고요와 혼탁한 폭력의 동거(同居)에 관심을 갖게 되었다.

그 무렵 읽은 것이 정지용(鄭芝溶)이다.
그에게서 나는, 물론 차원은 다르지만, 나와 비슷한 심한 혼란을 보았다. 모더니즘과 문화적 민족주의와 깊은 가톨릭신앙이 통합되지 않은 채 이리 저리 엇섞이면서 회전하는 한 상상력의 나선형을 보는 듯했다. 그러나 지용(芝溶)은 백록담(白鹿潭)에서 그 모든 혼란을 통합하지 않은 그대로 둔 채로 한 차원을 높여버리는 시적(詩的) 기적(奇蹟)을 창조하였다.

내가 좋아하던 '인동초(忍冬草)'는 이미 친북자(親北者)로서의 부역(附逆) 운운하는 한계를 일찌감치 넘어서는 '경건한 매혹'을 이루고 있었다.

원주의 그 겨울은 지난 해의 민족민중적 혁명문학에 대한 나의 관심과 충돌을 일으켰다.
솔직히 말해서 나는 무슨 일관된 주의자(主義者)가 될 수 없었다. 사회변혁을 위해 이념은 방법적으로 필요하다고 보았다. 그러나 그에 바로 이어서 영적(靈的)인 평화(平和)와 내면(內面)의 새로운 발견, 정신적 수양(修養)의 중요성이 머리를 들곤 했다. 불교에 대한 관심과 가톨리씨즘에 대한 흥미가 또 하나의 갈등이었다.

원주에서의 그 겨울은 따뜻했다.
극심한 혼란 속에서도 가슴이 따뜻했던 것은 손창성의 조폭적(組暴的)인 매혹이나 로싸의 '벌거벗은 수녀(修女)'같은 금지된 관능(官能)이 아니라 마종하의 고정 시어(詩語)였던 '베로니카' 때문이었던 것 같다.

'베로니카'의 구체적 실감이나 영상이 없으면서도 시행(詩行)이 이른바 '에어포켓'에 빠지려하면 그 틈을 '베로니카'가 땜질하는 마종하의 시작(詩作)이나 그것을 중심으로 한 그의 이미지네이션은 내게 이상한 친밀감, 마치 친 아우의 익숙한 장난같은 느낌, 한겨울의 뻬치카같은 따뜻함을 주는 것이다.

생각하면 그 겨울은 내게 있어 기인 장정(長征) 직전의 휴가 같은 것이었다. 그리고 그것을 분명히 예감하면서 다시 한 번 내가 살벌한 정치적 폭력이나 투쟁보다 한 줌의 곡식이나 한 줌의 보드라운 흙이나 한 줌의 꽃씨들을 더 사랑하고 있다는 것을 알게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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