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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지하 회고록 '나의 회상, 모로 누운 돌부처' <1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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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지하 회고록 '나의 회상, 모로 누운 돌부처' <118>

미국

미국은 한국에 대해서 무엇일까?

이 질문 이상 바보소리가 없고 이 질문에 대한 대답치고 바보소리 아닌 것이 없는 것, 그것이 바로 미국이라는 존재다.

그러나 그 때 그 무렵 우리들 사이에서 미국은 누구나 잘 알 듯이 신식민주의, 패권주의, 제국주의 종주국이었고, 6·25 전쟁의 경험을 일단 함구(緘口)한다는 조건이라 하더라도 매우 고약한 상대로서 인식되었다.

그러나 그같은 고약함에도 불구하고 수많은 청년들이 그리로 유학가고 그보다 더 수많은 사람들이 그리로 이민가고 그보다 더욱 더 많은 사람들이 그리로 장사등을 위해서 여행했으니 미국은 마치 한국이라는 성곽이나 요새 저 안쪽의 '내지(內地)'같은 곳이고 모든 정치군사의 지휘부요 모든 좋은 일의 문화적 총본산같은 지역이요 고향같은 존재였다.

그 언젠가 KAL기(機)가 북한에 '하이재킹'되었는데 그 승객들중 취조문답에서 이런 말 하는 여자(女子)가 있었다.

'통일되면 어떡하려고 그런 반동적인 생각을 고치지 않소?'
'미국가서 살지 뭐!'

'미국이 고향이요?'
'고향은 아니지만 한국보다는 더 잘사는 나라니까요. 좋은 나라예요'

그리하여 미국은 경계하고 비판해야 될 존재였다. 가능한 한, 그리고 그 무렵의 제3세계적 인식에서는 필연적으로 몰락해야 할 또 하나의 로마제국(帝國)이었다. 우리의 청년 학생들 모든 지식과 담론이 미국을 그렇게 비판하고 있었다.

그런 아득하고 멀기만한 미국에 나는 꼭 두 차례나 잠깐씩 다녀온 적이 있다. 최근이다.

몸을 고쳐볼 요량으로 단학선원에서 진행하는 여행 및 치유 프로그램에 참가하여 LA공항에 내린 뒤 비행기를 바꿔타고 아리조나의 피닉스에 가서 거기서 다시 뻐스로 몇시간 달려 사막도시 '세도나'란 곳으로 갔다. 거기서 돌아올 때는 똑같은 코스거나 아니면 쌘프란시스코 공항을 거쳐 귀국하는 두 차례의 사막방문이었다. 그러니 대도시에는 들어가 보지도 못하고 사막에만 머물다 LA와 쌘프란시스코 두 공항을 겉만 슬쩍 보고 온 것이다.

그런데도 나는 두 번 다 저윽히 놀랐다.
두가지다.
하나는 비행기 창 밖으로 내려다보니 아리조나 사막과 서부의 드넓은 무인지경(無人之境)의 큰 광야에 도로와 수로가 모두 촘촘히 정비되어있고 곳곳에 싸이로와 저수(貯水)탱크 등이 구비되어 있으며 공황이 닥칠 경우 이 광야에 도시 인구를 대량 이주시켜 농사를 짓게 한다면 경기가 호전될 때까지 몇 년간은 넉근히 우선 밥문제, 집문제 등은 해결할 수 있을 것 같았다.

미국 몰락의 계기를 도시의 공황으로만 생각해온 나로서는 소름끼치도록 놀라운 광경을 목격한 것이다.

그리고 또 하나는 LA와 쌘프란시스코를 출입하는 각종 피부색과 각종 언어를 쓰는 수도 없이 많고 많은 그 여행객들이었다. 그것은 바로 전세계 자체였고 전지구의 유목거점(遊牧據点) 자체였고 지구문명과 인류의 현대문화 그 자체였다.

그것은 미국이 세계를 지배하고 있고 세계 지배를 긴 기간 유지할수 있다는 가시적 증좌였다.

태평양 위를 나르며 나는 생각했다.
미국의 뇌수를 바꿔야 한다.

새로운 문화와 사상으로 미국의 뇌세포를 바꿔야 한다. 그래서 달라진 정신으로 그 광대한 포용력과 무적의 통제력을 새 지구문명과 새 인류문화 창조를 위해 좋은 방향으로 활용하도록 해야 한다.

분명한 것은 미국은 쉽게 몰락하지 않되 그 뇌수는 비었거나 잘못 방향을 잡았거나 썩었다는 것이고, 그 뇌수에 새로운 콘텐츠를 수혈할 곳은 바로 동북아시아요 그중에도 그 복판이며 그 원형을 다분히 간직한 한반도, 한민족이란 것이었다.

김일부(金一夫)의 정역(正易)에, 정동(正東)·정서(正西)사이의 새로운 협력, 즉 '간태합덕(艮兌合德)'이란 말이 비친다. 새 시대의 창조적 중심은 정동(正東)의 한반도와 정서(正西)의 미국이 서로 음악과 율려(律呂)와 사회제도 즉 예(禮)의 창조적 변혁을 향해 연합된 에너지에 있으니 그 시적인 은유가 바로 '동쪽 산의 최고봉인 38선(三八線)에 서쪽 성채같은 산 앞의 백로가 푸드득 날아든다(東山第一 三八嶺 西塞山前 白鷺飛)다.

그런데 1963년에 무슨 일이 있었던가?
동두천의 한 미군부대에서 어떤 한국소년 쑈리를 미군이 머리를 강제로 박박 깎고 옷을 벗겨 엉덩이에 페인트를 칠한 뒤 궤짝에 넣고 못질해서 오산의 미군기지로 일종을 택배를 한 사건이 있었다. 민족적 분노가 반도 전체에 들끓었다. 그러나 그런 사건을 법적으로 취급할수 있는 한·미간의 협정이 없는 현실이었다. 서울대 문리대는 제일 처음 앞장서서 '한미행정협정체결촉구시위(韓美行政協定締結促求示威)'를 시작했다.

나는 그 날 시위대(示威隊) 속에 있었다.
동숭동 문리대 정문의 돌다리 위에서였다.

시위대(示威隊) 앞으로 일개 중대정도의 군병력이 총에 착검을 하고 칼날을 수평으로 세워 들이대며 명령에 따라 일보 또 일보 다가들었다.

순간 화가 나서 총칼을 손으로 잡아 크게 다치는 학생도 있었다. 내 가슴 바로 앞에 들이댄 총칼을 보며 가슴 밑바닥에서 갑자기 들끓기 시작한 시뻘건 분노를 나는 어쩔 수가 없었다.

그 분노!
이것이 나의 행동의 시작이었다.

잠깐 뒤로 물러선 진압부대 앞에 한 장교가 우뚝 나서며 떠들기 시작했다.
'학생들!
정신을 똑바로 차리시오.
미국은 우리의 우방이고 동맹국이요.
6·25때는 우리를 혈맹으로서 구원했어요.
그 정도의 문제를 가지고 여러분처럼 적대행위를 한다면 좋아할 것은 북한의 김일성이 뿐일 것이요.
냉정하게 이성을 회복하시요.'

그러나 나의 행동은 시작되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며칠 후 나는 서울 의과대학 구내에 있는 함춘원(含春園) 숲속에서 당시 정치과 학생으로 시위를 조직했던 김중태(金重泰)를 만났다. 김중태는 웅변가였다.

'김형!
4·19는 5·16에 대한 반격을 시작해야 합니다. 4·19를 경험한 김형이 우리에게 필요합니다.

우리는 문화(文化)에 있어서도 전선을 만들어야 합니다. 협조합시다.
우리는 전국 각 대학을 연합하고 야당이나 언론과 연대할 것입니다.
이번엔 상대가 미국이었지만 이제부터는 일본과 밀착해 가고 있는 현 군부정권이 주적(主敵)입니다.
내년 봄부터 시작입니다.
투쟁은 필사적인 것이 될 것입니다.
각오를 단단히 하십시오.
참여해 주시겠지요?'
당시 '새세대'를 편집하고 있던 정치과의 김도현(金道鉉)과도 만났다.

그러나 나는 그 때까지도 내 결단이나 행동의 약속을 일체 표현하지 않았다.
물론 내 마음은 들끓기 시작했고 내 삶은 이미 행동 속으로 빠져들고 있었으나 내 뇌리엔 아버지의 얼굴, 어머니의 얼굴이 클로스엎 되고 있었다.

나는 굳게 입을 다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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