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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지하 회고록 '나의 회상, 모로 누운 돌부처' <1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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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지하 회고록 '나의 회상, 모로 누운 돌부처' <117>

광주공민학교

목포에서 서울로 돌아온 것은, 햇볕은 따갑고 그늘은 추운 초가을, 토용(土用)의 계절이었다. 학교에 들려보니 조동일형이 사방으로 나를 찾고 있었다.

그때 서울대 선후배 등을 중심으로 한 전투적인 민족주의 그룹이 경기도 광주의 한 시골마을에 농촌 청소년들을 대상으로 공민학교를 운영하고 있었는데 거기서 개교기념으로 연극을 했으면 좋겠다는 것이었다. 시간이 별로 없어 2, 3일안에 연극 하나를 뚝딱 만들어내야 한다는 거였다.

하늘은 시퍼렇고 하얀 메밀꽃이 언덕 기슭에 널리 흐드러져 눈부시게 피는 어느 날 나는 연극하는 동료 황기찬형과 함께 조형을 따라 광주의 그 시골 공민학교를 찾아갔다.

생각해보니 그 무렵의 아직 자기정체성과 민족민중적인 혁명의식을 채 완벽하게 정비하지 못한 나 자신과 농민들과의 사이에서 나는 조금 자격지심과 농촌을 잘 모른다는 컴플렉스를 갖고 있었던 것 같다.

우선 내 복장도 문제였다.
당시 유행하던 청년들 캐쥬얼에 분홍색 구두를 신고 있었다. 그것은 아버지 때문이었다. 아버지는 셋방살이에다 경제가 조금 궁해도 생활의 멋만은 잃지 않으려 했고 나에게도 구두니 옷이니 외식(外食)할 경우같은 때에는 유행에 앞서가기를 기대했다. 그 때의 멋쟁이 분홍구두도 원주의 아버지 친구인 제화점(製靴店) 주인의 호의로 얻어신은 것이었다. 당시의 농촌 출신 좌파들에게는 내가 그저 연극이나 문학, 미술을 취미로 하는 댄디 정도로 보였던 모양인데 그렇다 하더라도 그리 억울할 것은 없다.

해방 직후 월북한 당시의 한 청년시인 박산운(朴山雲)의 싯귀와 같이
"가난은 결코 자랑이 못되는구나
오오
쌔하얀 白米와 같이 빛나는
조국이여!"와 같은 솔직한 메시지가 내겐 건강하게 보였지 일부러 지지궁상을 떨거나 다방에서 이를 잡으며 '혁명충'이라고 떠벌리거나 레닌모에 탱크바지 차림으로 등퇴교하는 자칭 맑스뽀이들은 취미없었다. 대개 그런 친구들이 훗날 졸업한 뒤엔 극소수이긴 하나 극좌로 나가 장기적인 감옥과 감시 속에서 시들어버리거나 우파적으로 출세가도를 달려 재벌의 총아나 권력의 첨병이 되었다가 그 재벌기업과 박정권의 쇠퇴전변과 함께 몰락해 버리곤 했었다.

다아 갔다.
조형은 훗날 이렇게 말했다.
"그 숱한 좌우익의 정치경제 방면 홍길동 낭만주의자들은 다 몰락해 버리고 문화쪽에서 오직 김형하고 나만 남았어. 이것은 내 말이 아니고 저 유명한 과격파 김정강(金正剛)이가 정신문화연구원에서 만든 구술(口述)에 의한 자서전에서 강조한거야, 우습지?"

우리가 찾아 들어간 공민학교 건물 안에서 청소를 하던 그 마을의 중학생 소년 하나가 날더러 배우같다고 하며 자꾸만 졸졸 따라다녔고 역시 한 사람의 강력한 민중민족주의자라는 그 공민학교 교장이자 선생인 한 친구는 나의 복장을 두고 슬슬 비아냥거렸다.

출연할 청소년들이 모이려면 해가 져야 한다는 거였다. 황형과 나는 병소주를 몇 개 구해가지고 뒷산 언덕으로 올라갔다. 초가을 오후의 뜨거운 태양 아래 푸른 광주산맥이 멀리서 힘차게 굽이치고 그 골짜기와 벌판에는 띄엄띄엄 마을들이 보였다.

언덕에 앉아 술을 마시며 두 사람은 플롯과 대사들을 짜나갔다. 농촌선전이나 계몽연극이란 뻔한 얘기였고 두 사람은 그걸 연극적으로 환히 알고 있었기 때문에 일을 금방 끝내버렸다. 그 뒤에 우리가 무얼했는지는 잘 기억나지 않는다. 다만 땅거미 내리는 시골 언덕에 서 있는 내 삶이 슬프고 나의 불확실한 미래가 슬펐다. 그런데 무슨 까닭인지 그 때를 생각하면 꼭 떠오르는 한 마디가 있으니 당시 번역되어 유행하던 일본의 한 대중소설 '푸른 꿈은 빛나리'라는 작품의 제목이다.

그 내용도 그 때의 정황과 직접적 연관은 없다. 그러나 저녁이 되자 우리를 찾아낸 조형을 따라 두 사람이 그 지역의 읍치(邑治)가 있는 마을 식당으로 밥 먹으러 가던 길에서 본 작은 시내와 지금 막 익기 시작한 벼이삭의 누른 물결너머로 해가 넘어가는 농촌 풍경은 이상하게 내 마음을 불행과 그리움과 비극적인 삶의 울림으로 가득 채웠다.

"왜 그래? 괭장히 우울해 보여!"
황형의 말이었다.

우울?
그래, 난 우울할 때가 많았다. 연극을 하면서 전라도 사람 특유의 유머가 흘러나와 나를 재미있는 사람으로 착각하게 했지만 전반적으로는, 그리고 바탕은 우울 일색이었다. 광주산맥의 그 저물녘의 푸르름이 내게 무엇인가 멀리 떠나가거나 아주 로맨틱한 삶을 동경하게 만들고, 지금의 처지가 그것과는 정반대인 점이 내 마음을 우울하게 했을까? 그럴까? 그것뿐일까?

나는 그뒤 광주에서 돌아왔을 때 그때의 미묘한 느낌을 '푸른 비녀산의 꿈'이라는 한 편의 서정시에 표현했고 그 시를 무척 아껴 늘 품속에 넣고 다니며 수시로 꺼내보곤 했으나 어느 날 만취해 어딘가에서 분실해버렸다.

그날 밤과 그 이튿날, 양일간에 한 편의 연극이 공민학교 마당에 가설한 무대 위에 올라갔다. 근처의 숲에서 생나무들을 쳐다가 무대 뒷편 아랫쪽에 못으로 고정시켜 놓고 마룻장이나 절구통, 세간붙이 등을 늘어놓은 위에 기둥과 이엉을 대강 만들어 집을 지어놓으니 세트는 그나마 괜찮았다. 그러나 대사를 외울 틈이 없어서 황형이 뒷편에서 대사를 읽어주는데 배우들은 못 알아먹고 뒤뚱거리고 프롬프터는 소리소리 질러대니 객석은 박장대소요 폭소부절이었다.

나는 언필칭 무대감독을 맡았는데 등퇴장에 서투른 소위 배우들을 바라보며 우리 민족 민중, 더욱이 농민들의 연극은 이게 아니라는 확신을 갖게 되었다.

당연히 그것은 탈춤이나 굿판이나 놀이종류이어야 했다. 아마도 그런 확신을 세우는 데에 그날 밤 무대가 유용했을까?

일본 소설 '푸른 꿈은 빛나리'가 그 때의 정황에 촉발되어 기억나는 것은 아마도 소설중에 태평양전쟁 패전 후 '아메리카나이즈' 과정의 일본 농촌의 민주주의 훈련이 코믹하게 묘사되어 있어서일 것 같다. 이런 점들이 이 때의 일과 관련이 있는 것일까? 등퇴장의 코미디는 말로는 표현할 수 없었다.

어떻든 이리저리해서 엉터리 연극 흉내를 끝마치고 이틀만에 서울로 돌아온 우리 두 사람에게 조형은 수고했다면서 술 한판을 걸찍하게 샀는데 그것이 저 유명한 명동의 '학사주점'에서였다.

아마 꼭지가 확 돌았던 것 같다.
너무 취해 집엔 못 가고 술집 뒷방에서 쓰러져 자고 나서 이튿날 아침에야 하숙에 돌아왔으니까. 그때 만난 친구가 지금은 민족전통무술학원을 열고있는 임동규형이다. 그는 그 때 학사주점의 운영 책임자였다.

돌아오는 뻐스 속에서 계속 생각나는 일이 있었다. 공민학교의 연극을 끝낸 그 날 밤중에 잠자리에서 조형과 그 학교 교장 사이에 설전(舌戰)이 있었다. 조형 주장은 교장이 입신출세주의에 빠져 시골에서 유지행세를 한다는 공격이었고, 교장은 조형이 농촌 실정을 잘 모른다고 반박했다.

이와 똑같은 논쟁이 훗날 악어(鰐魚)라는 별명으로 통했던 한기호(韓基昊)선배와 기독교 신학대학을 중퇴하고 장(일순)선생님을 따르는 '원주캠프'의 농촌운동 거점인 김포의 '빈손농장'을 운영하던 김익수선배 사이에서, 또 형태는 다르지만 한기호선배와 고인이 된 이동규(李東奎)형 사이에도 벌어졌던 것 같다.

그런 일들이 나중에는 다반사가 되었고 논쟁과 분파 투쟁은 도리어 합법칙적인 변증법적 과정으로 통하고 있음을 후에야 알게 되었다. 고약한 합법칙성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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