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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지하 회고록 '나의 회상, 모로 누운 돌부처' <1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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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지하 회고록 '나의 회상, 모로 누운 돌부처' <116>

황톳길

남도의 황토빛은 누른빛이 아니다.
그것은 핏빛이라 해야 옳다.

강변으로 난 그 핏빛 길을 따라 화당으로, 부줏머리로, 오감리로, 상리로 며칠을 일삼아 십리나 이십리 길을 걷고 또 걸었다. 호풍이네 과수원 너머 갓바위, 그 밑에서 물결치는 푸른 물에 출몰하는 돌고래떼도 여전하고 물 위로 숭어들 여전히 햇빛에 반짝이며 뛰어 오르고, 여전히 먼곳 월출산은 푸른빛으로 아스라한 그곳, 바로 그곳에서 민족의 변란은 일어났고 피들은 그곳에서 흘러내려 아마도 흙빛이 핏빛이 된 것일까?

그 이전의 동학(東學)과 남학(南學), 그 이전의 후백제(後百濟), 그 이전의 백제부흥군(百濟復興軍)!

아아 한없이 지속되는 피의 역사는 이 땅을, 흙을, 길을 핏빛으로 물들이고 푸른 강물과 눈시리게 번뜩이는 탱자나무들은 무수한 송장들의 한(恨)으로 인해 더욱 짙푸르렀을까?

결코 사람만이 아니었다.
6·25 때는 갯벌의 그 흔한 꼬막마저도 집단폐사했고 3년간 무서운 가뭄과 흉년이 휩쓸어 초목조차 도처에서 시들었다.

이 땅의 운명은 무엇인가?
이 민족의 운명은 무엇인가?
이 민중의 운명은 무엇인가?
이 지역의 운명은 무엇인가?
이 연동이란 동네의 운명은 무엇인가?
내 가족의 운명은 무엇인가?
내 할아버지, 할머니, 아버지, 어머니의 운명, 그리고 나의 운명은 무엇인가?

비극적 최후의 예감을 강하게 안고서도, 죽임과 패배를 분명히 느끼면서도 그 피의 자리에로 능동적으로 나아가 그 무자비한 죽임을 끌어안음으로써 수천년 수만년 생명의 순환적 생성질서 안으로 끌려 들어가 자취 없이 사라져간 저 숱한 사람들의 또 하나의 내면생성의 역사! 생명생성의 역사!

역사로부터 시작하고 역사로 돌아갈 운명이지만 지식인, 지도자들의 그 역사가 아닌, 그 자체로서는 역사와 반대되기도 하는, 그럼에도 그 역사의 뒤에서, 밑에서, 그리고 감추어진 그 안에서 생성하는 카오스 민중, 대중적 민중, 앞으로 다가오고야 말 민중의 또 하나의, 역사 아닌 역사! 생성으로서의 참다운 시간!

나는 이 황톳길에서 그 때 한편의 시(詩)를 얻었으니 그것이 바로 '황톳길'이다.

나의 출사표(出師表)로도 불리는 그 비극적인 시 '황톳길'은, 그리고 나의 민중, 민족 문학의 길은, 나아가 생명문학의 길은 이렇게 해서 그곳, 핏빛의 땅에서, 과거의 아픈 상처에 대한 기억과 대면을 통해서, 직시를 통해서 어렵게 어렵게 탄생했다.

황톳길에 선연한
핏자욱 핏자욱따라
나는 간다 애비야
네가 죽었고
지금은 검고 해만 타는곳

두 손엔 철삿줄
뜨거운 해가
땀과 눈물과 모밀밭을 태우는
총부리 칼날아래 더위 속으로
나는 간다 애비야
네가 죽은 곳
부줏머리 갯가에 숭어가 뛸 때
가마니 속에서 네가 죽은 곳

밤마다 오포산에 불이 오를 때
울타리 탱자도 서슬푸른 속이파리
뻗시디뻗신 성장처럼 억세인
황토에 대낮 빛나던 그날
그날의 만세라도 부르랴
노래라도 부르랴

대삽에 대가 성긴 동그만 화당골
우물마다 십년마다 피가 솟아도
아아 척박한 식민지에 태어나
총칼 아래 쓰러져 간 나의 애비야
어이 죽순에 괴는 물방울
수정처럼 맑은 오월을 모르리 모르리마는

작은 꼬막마저 아사하는
길고 잔인한 여름
하늘도 없는 폭정의 뜨거운 여름이었다
끝끝내
조국의 모든 세월은 황톳길은
우리들의 희망은

낡은 짝배들 햇볕에 바스라진
뻘길을 지나면 다시 모밀밭
희디 흰 고랑너머
청천 드높은 하늘에 갈리던
아아 그날의 만세는 십년을 지나
철삿줄 파고드는 살결에 숨결 속에
너의 목소리를 느끼며 흐느끼며

나는 간다 애비야
네가 죽은 곳
부줏머리 갯가에 숭어가 뛸 때
가마니 속에서 네가 죽은 곳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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