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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지하 회고록 '나의 회상, 모로 누운 돌부처' <1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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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지하 회고록 '나의 회상, 모로 누운 돌부처' <115>

순애고모

연동에 있던 그 무렵 한밤에 공사판 근처의 포장마차에 갔던 적이 있다.

거기, 바로 거기서 오빠가 경찰에게 맞아죽은 충격으로 6·25때 좌익을 하다가 후퇴 때에 백아산에 입산했다는 아득한 소문만 떠돌던 순애고모가, 그래, 틀림없는 순애고모였다! 한 경찰관의 첩이 되어 산다더니, 바람 몹시 불어 포장마차 전체가 날아갈듯 흔들대는 거기 공사장 근처 다리뚝 바로 위의 그 포장 속 목로에 앉아 건너편의 나를 멀건히 쳐다보고 있었다. 순애고모였다.

그런데 섬뜩한 것은 바로 그 가까운 자리에,
상섭이!
우리는 늘 존칭없이 그렇게 그를 불러왔는데, 소위 지리산 공비토벌대의 맨 앞장에 섰던 좌익 전향자들의 육탄정찰대인 '보아라부대' 소대장으로 한때 몹시 휘젓고 다니던 그가 거기서 술에 취해 시뻘건 눈으로 순애고모를 빤히 노려보고 있었던 것이다. 다시금 섬뜩했다.

나는 얼른 고모를 끌고 나와 영산강가의 캄캄한 왕자회사 옛 고무공장 근처로 함께 갔다. 캄캄한 그곳!

'어떻게 살았어요?'

'죽지 못해 살았제 잉-.'

'한 일곱달 감옥에 있었제 잉-.'

강바람은 캄캄했다.
소금끼까지 얹힌 밤바람은 그 자체가 이미 치욕이었다. 그 바람의 끈적끈적하고 캄캄한 감각은 지난 날 우리 삶의 밑바닥에 도사린 '짐승같은 어둠의 시간의 정체', 바로 그 '가난'의 본질이었다.

한편에는 끝없는 복수심과 혐오감과 증오, 다른 한편에는 무섭고 두려워하는 마음이 감추고 감추고 또 감추고 나서도, 감춘 사실마저도 감추고, 감추는 제 마음마저 감추어도 기어이 두려움은 사라지지 않았던 그 캄캄한 이중적 '중력장중독(重力場中毒)'의 시간, 빛없는 땅끝의 시간! 4백만이 도륙당한 역사라는 이름의 끔찍한 변란!

순애고모는 그 한복판에 서서 파들파들 떨고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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