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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지하 회고록 '나의 회상, 모로 누운 돌부처' <1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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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지하 회고록 '나의 회상, 모로 누운 돌부처' <114>

봉제삼춘

거기
고향 목포 연동(蓮洞)에서의 나날, 나의 내면의 나날은 피와 기침과 식은땀과 술과 갈증과 외로움, 그리고 간단없는 절망 속의 악몽과도 같은 나날이었다. 그럼에도 나는 바로 내가 태어난 연동 뻘바탕의 국토개발 도로공사 현장에서, 소위 '스테바'라는 이름의 삽질하는 곳에서 가끔씩 일당을 받고 일도 하고 그 근처 내 어린 시절의 유목지대를 어슬렁거리며 돌아다니곤 했다.

음양(陰陽)이었다.
도로공사 현장에서 내 유년기에 세들어 살던 집안의 먼 친척뻘되는 '봉제(鳳濟)삼춘'을 만난 것은 아마도 내 인생과 시력(詩歷)에서 아주 중요한 사건일 듯하다.

봉제삼춘은 그 노가다판의 십장이었는데 늘 막소주에 취해 눈이 뻘겋게 충혈되어 있었고 걸핏하면 싸우고 트릿하면 사람을 마구 두들겨 팼다. 순 막보기 깡패대장이었다. 역설이지만 그런 깡패가 고학(古學)이 깊어서 두보(杜甫)와 이태백(李太白)을 줄줄 외우고 특히 김삿갓을 즐겨했다. 말투가 괴상하고 말솜씨가 줗아서 그 앞에서 엄벙덤벙하다가는 큰 코 다쳤다.

한 번은 좀 까다로운 나이든 사람과 시비가 붙었는데 왈
'당신 참말로 묘(妙)하요 잉-, 묘(妙) 짜를 으뜨케 쓰는지 아시오? 계집 녀(女)변에 작을 소(小)짜여라우! 계집애처럼 작단 말이제 잉-.'

우리는 밤에 술 한 잔 하고 나면 으레껏 공사판의 드난데에 세워둔 '구루마', 그러니까 마차받침 위에 누워서 밤하늘에 가득찬 별들과 그 사이를, 그 위를 흘러가는 흰 구름들을 쳐다보며 한없이 긴 침묵에 빠져들곤 했다. 그럴 때 간혹 봉제삼춘은 내게 착 가라앉은 침울한 목소리로 띄엄띄엄 말하곤 했다.

'아야 영일아, 잉-
나 암만해도 전생에 별에 살았든가 봐야. 으째서 요로큼 별만 보면 눈물이 나는지 모르겄어야. 참말로 볼 때마닥 한없이 흐르고 그렁께. 이상하제 잉-.'

별!
별이 된 봉제삼춘!
늘 청산가리 병을 품고 다니던 삼춘! 스스로 욕된 삶을 끊을 수 있어야만이 자존심 있는 인간이요, 그것이 인간의 마지막 품위라고 씹어뱉듯 주장하던 사람, 세 번씩 자살기도를 했지만 실패하고 그 뒤 한동안은 살아보려고 그리 애도 써봤다던 삼춘!

나와 헤어진 뒤, 그러니까 3년 뒤 목포에서 올라온 친척편에 들으니 나와 헤어진 뒤 얼마 안돼 대흑산도(大黑山島) 예리 뒷산에 올라가 한밤에 기어이 청산가리로 목숨을 마감했다고!

별로 돌아갔구나!
그때 그리 생각했으나 눈물은 나지않았다.
나의 초기 시 가운데 '산정리 일기(山亭里日記)'라는 작품이 있는데 바로 거기에 잠깐 비치는 해주(海州)영감의 성깔의 이미지는 바로 봉제삼춘이요, 모습은 당시 부정으로 중선 지역에서 판사직을 파면당하고 거기 흘러와 노가다로 일하던 한 늙은 법관이다. 깨곰보는 포장마차에서 맘보(전표) 장사하던 한 소년이다.

이 시는 그러나 몹시 우울하다.
나의 내면풍경이기도 하다. 옛날은 끝나가고 새날은 아직 오지 않은 여명에 잠 못 이루는 사람과 같다. 그러니까 밤에는 그 한없이 가라앉는 스스로의 침체와 환멸, 그리고 낮에는 한없이 분노하고 들뜨는 강요된 앙양과 요동 사이에서 서서히 죽어가는 노동자의 깊은 영혼의 만가(晩歌)를 목격하며 나는 역시 이상하게도 전세계 좌파운동의 비극적 최후를 아마 생리 속에서 예감했던가!

봉제삼춘 가라사대,
'좌익 갖고는 안 돼야! 나도 많이 봤제잉-. 우리 형님 그거 아니라고, 왼손잽이! 너무 단순하당께! 우리나라 같은 문제는 아조아조 복잡해! 복잡하단 말이여-. 딴 것이 나와야 돼야! 동양에서 나와야! 두보나 이태백이가 혁명을 해야 한당께-. 김삿갓이가 팔 걷어붙이고 나오등가, 잉-.'

내가 늘 봉제삼춘을 못 잊는 까닭이 여기에 있다. 한국이나 동양발, 동북아시아발, 새로운 상상력 체계나 깊고 크고 드넓은 새 문화이론, 새 문화혁명 담론과 사상에 의한 근원적인 미적 교육으로부터 다시 시작되는 인간, 사회, 지구, 우주의 근본혁명 아니면 진짜 변혁이 안 된다는 말을 바로 그가 했기 때문이다. 그 도로공사판의 마차받침 위에 누워 한없이 흐르는 밤하늘 구름들을 쳐다보며.

그래서 나는 그의 자살소식에 울지 않았던 것이다. 그의 바로 이런 명증성과 천재성은 높은 자존심을 동반하기 때문에 욕된 삶을 스스로 정리하지 않고는 도저히 견디지 못하는 법이다.

별!
참으로 별같던 사람 봉제삼춘!
드디어 별로 돌아갔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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