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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지하 회고록 '나의 회상, 모로 누운 돌부처' <1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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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지하 회고록 '나의 회상, 모로 누운 돌부처' <113>

김현

나야 조직이나 붕당을 애초부터 피해온 사람이지만, 분명 경향으로 따진다면 대체로 김현과는 어긋난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인간적으로는 김현이 내게 퍽 다정하게 대했다. 그리고 자기 입맛에 조금이라도 접근하는 작품이 있으면 뛸 듯이 기뻐하며 술을 사기도 했다.

그러나 자기 입맛에 안 맞아도 가능하면 도움을 주려 했으니 그와 나는 같은 전라도 목포출신이었기 때문도 있겠으나 덕으로 따진다면 나의 덕성이라기보다는, 그의 덕성일 것이다. 왜냐하면 '창비'에서 퇴짜놓은 그 시편들이 김현의 비공식적 추천으로 조태일 시인의 검토를 거쳐 당시의 시전문지 '시인(詩人)'에 거듭 2회에 걸쳐 발표됨으로써 늦으막히 1969년도에 내가 문단에 나왔기 때문이다.

이 말을 듣는 모든 문인(文人)들은 재미있어 한다. 왜일까? 이것은 '덕성'이나 '블럭'의 문제가 아니라 '시안(詩眼)'의 문제로 보였기 때문일 것이다.

그 김현이 1963년 초여름 대학신문에 '살비아 -애수(哀愁)와 폭력(暴力)에 관하여'라는 미학에쎄이와 그 무렵 목포문협의 기관지 '목포문학'에 최하림 시인이 김현을 통해 청탁해서 게재된 나의 '저녁 이야기'라는 시를 보고 좋아하며 그 여름방학을 목포 자기 집에 와서 보내라고 나를 초청한 일이 있다. 비용은 자기가 다 부담할테니 염려말고 곧 내려오라는 거였다.

접시에 흙을 담았다
가락지는 흙속에
저녁속에 있다.

나무는 말을 안한다
말은 기일게 길을 달리며
누군가의 입술은
움직이다 말 것이다.

접시가 깨어진 것은
줄간, 무너진 돌기둥 밑이나
바위밑 접시쪽 깨어진 한 모서리
내 지문(指紋)은 있다.

우리는 너무나 기인 목의 춤을 추지만
흰길이 고사리 까맣게 피울지도 모른다.
아마도 달이 뜨면
네가 네손을 내게 빈틈없이만 준다면

또한
그것은
아마
아주 鑛石인지도 모른다.

허나
차디찬 너의 얼굴, 허나
허나 네 입술은 퍼어런 금이 많음을
나무는 또한 말을 안한다.

겨울이 하나씩
분홍빛 거울속을 지나가지만
그렇게도 가지만
나무는 또한 말을 안한다.

기인 말울음 끝에 뜨는 달
달빛으로 그리인 접시에
차라리 붉은 접시에
흙을 담지만

흰 모시옷, 내가 쓰러지고 저녁에는
가락지와 이제
접시는 이제
없다.

한 여름날 저녁 무렵에 나는 문득 김현의 집에 도착했다. 부두 가까이에 있는 그의 형님이 운영하는 큰 약국이었다.

그와 나는 인연이 안 맞았는지 바로 그날로 사단이 났다.
김현, 최하림과 술을 엉망으로 마신 끝에 그의 약국집 이층 그의 방에 올라간 나는 정신없이 열린 창문을 통해 그 집마당에다 길고 긴 오줌을 내깔겼다. 마침 마당을 지나 안으로 들어가던 그의 형 머리 위에 그 해맑고 보배로운 물줄기가 냅다 쏟아진 것이다.

그 이튿날 아침 나는 쫓겨나서 목포시 변두리 달동네인 연동에 있는 작은 고모네집으로 거처를 옮겼다.

옮긴 뒤에도 시내에서 김현과 최하림 시인을 매일 낮에 만나 큰 중국집 상해식당에서 그가 사는 짜장면과 저녁에 역시 그가 사는 소주를 얻어마시며 문학을 논하고 철학을 이야기하며 전라도와 바다가 가지는 문학적 상상력과의 관계를 파고들기도 했다.

역시 인연이 안 맞았다.
그때 화가 김수남씨와 유달산 기슭에서 잔뜩 마셔 꼭지가 돌아간 우리는 목포 예총 사무실에 가서 장난하다 의자와 책상을 험하게 망가트렸다. 그 이튿날 예총 지부장 차재석(車載錫) 선생으로부터 일종의 파문선고, 그러니까 고향의 문단이나 예술계에는 발을 붙이지 못하도록 엄중한 질책을 받았다.

나는 그 뒤 시내에 잘 안나가고 연동의 고모집에 죽치고 앉거나 그 근처를, 내가 어릴 때 뛰놀던 옛 터를 어슬렁거렸다. 아마 그 뒤로부터 김현과 나는 그저 그런 사이로 소원(疎遠)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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