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보기에 조동일 교수는 천재다. 그리고 보기 드문 학자중의 학자다. 그는 철학과 예술을 통해 현시하는 동북아시아 특히 한국의 독특한 사상을 개념이나 감성 양쪽을 다 놓치지않고 함께 통합, 함께 새 차원으로 드높이려는 의도에서 '문학사'를 선택한 사람이다. 문학 안에서 철학과 역사를, 철학과 역사 속에 실현되어가는 문학과 예술의 지향 및 그 가치들을 '형성과정에서' 역동적으로 파악하고, 특히 한국 유학(儒學)으로부터 이끌어 낸 기철학(氣哲學)의 원리와 실재의 방향을 현대적으로 연구, 새 길을 제시하려고 한다.
그는 경북고를 나와 문리대 불문과를 거쳤으며 국문과에 학사 편입하여 우리 문화, 우리 문학을 선진적으로 연구한 보석같은 사람이다. 나는 4·19와 5·16 이후 서울대학교의 문리대, 법대, 상대 등에서 불붙기 시작한 민족주의와 민족문화 열풍, 민족주체적인 세계관과 민중주체의 역사의식을 조형을 통해 받아들였고 새로이 채집되기 시작한 탈춤, 판소리, 민요, 무가(巫歌)와 민화, 민예 등의 내용과 형식에 대한 연구 및 그 방향성을 공유하며 '우리문화연구회' 운동에 곁에서 참여하였다. 정식멤버는 아니었다는 뜻이다.
우리 둘이 처음 만난 것은 민통 때였다. 조형이 기획한 남북학생 판문점 회담의 계획 속에 들어 있는 남북학생 민족예술회담 남쪽대표 두 사람으로 선발된 때였다.
아마도 별장 다방에서였을 것이다. 자기 자신과 함께 나를 선발한 장본인이기도 한 조형이 먼저 물었던 것 같다. 직접으로? 아니면 간접으로?
'김형의 미학적 신조는 무엇입니까?'
'리얼리즘입니다.'
'어떤 리얼리즘?'
'사회주의 리얼리즘은 아닙니다. 넓은 의미의 리얼리즘, 일부 모더니즘이나 초현실주의까지 끌어들이는 방법상의 리얼리즘입니다.'
'그건 제 생각과 같군요. 그런데 그건 마술적 리얼리즘인가요?'
'확실히 규정할 수는 없습니다. 나도 지금은 모색 과정이고 공부중입니다.'
'민족문학의 당위성은 인정합니까?'
'물론입니다. 그러나 그 폭이 확장되어야 합니다. 외국예술의 경험이나 미학도 충분히 받아들여야 합니다.'
'그건 저도 같은 생각입니다. 다만 반역사적이거나 반민족, 반민중적인 것은 걸러 내야지요.'
'그럴 필요가 있겠지요. 그러나 …….'
'모더니즘을 어떻게 봅니까?'
'누구의 모더니즘입니까?'
'엘리엇, 파운드, 발레리, 말라르메 등등'
'받아들일 건 다 받아들이고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이 …….'
'그것도 공부중입니까?'
'그렇지요.'
'공부하기로야 저도 마찬가지지요. 이번 회담은 완성된 결론을 선포하는 쪽보다 남북의 학생이 함께 걱정하고 함께 고민하자는 쪽입니다. 수락하시겠지요? 미학과에서 김형의 미학실력이 높다는 정보를 다 얻어냈습니다. 지금 공부하고 고민하는 방향을 민족과 사회, 그리고 민중적인 혁명방향으로 잡아줄 수 있겠지요?'
'노력은 하고 있습니다만 …….'
'그럼 됐습니다. 맡기로 하십시다.'
그리고 며칠 안있어 군부 쿠데타가 났고 우리는 한동안 서로 보지 못했다.
우리가 다시 만난 것은 1963년 초였다. 그러나 못 만나는 그 동안에도 그는 나를 예의주시하고 있었다. 그리고 시화전이나 문학의 밤, 시 낭송회, 그리고 대학신문 등에 발표되는 나의 작품의 한계와 가능성에 대해 꼼꼼이 분석하고 있었다. 특히 문리대 뒷뜨락에 있던 시청각교실의 무대에 내가 쓴 드라마나 내 연출작품이 올려졌을 때 다 보고 있었고, 그 무렵의 자기 친구들과 나에 대해 정보를 교환하며 토론하고 있었다고 한다.
나는 그 무렵 문리대 학보 '새세대'의 편집장인 역사학과의 심재주(沈在株)씨와 친해서 '세새대' 편집을 도와주고 미학이나 시학 관련 기고도 하며 가끔 시도 발표하고 있었다.
내 기억으로는 1963년 여름 무렵, '새세대'에는 헤겔 우파 미학자인 카알·로젠크란쯔의 '서귀(西鬼)의 미학소묘(美學素描)'가, 그리고 거의 동시에 '대학신문'에는 시 '용담리에서의 나의 죽음은'이 실렸고, 이어서 '대학신문'에 '살비아 - 애수(哀愁)와 폭력(暴力)에 관하여'라는 미학 에쎄이가 발표되기도 했다.
다분히 '슈르적(的)'이었는데, 훗날 들으니 그럼에도 불구하고 조형은 그 외면들 안에, 그리고 그 표현들 밑에 도사리고 있는 민중적인 우울과 민족적인 리듬의 싹을 꿰뚫어 읽고 있었다고 한다. 도리어 조형은 한 발 더 나아가 거꾸로 민족리얼리즘 안으로, '슈르的인 것'이나 '모더니즘的인 것'까지도 부분적, 부정적(否定的)으로 접수·계승할 수 있고 또 그렇게 해야 한다는 데에까지 가 있었다고 한다.
하기야 루이 아라공이나 뽀올 엘뤼아르, 그리고 빠블로 네루다의 예(例)가 있고 그림에서는 피까소나 시케이로스, 디에고 리베라 등의 예(例)가 있었으니까. 그가 국문학 이전에 불문학을 통해서 유럽 문학이나 서양예술을 꿰뚫고 있었던 것이 도리어 그의 큰 자산이었다.
우리가 다시 빈번하게 만나기 시작했을 때 이 모든 테마들이 이야기되고 또 토론, 검토되었다.
민족미학, 민족예술, 민족문학에 대한 끊임없는 토론이 있었고 민족에 대한 뜨거운 열정과 민중에 대한 사랑, 그리고 제3세계적인 세계인식을 다양하게 말하고 자기 인식을 나누었다. 우리는 한패거리가 되었다. 거기에 서정복과 이돈녕, 주섭일 등의 친구가 가끔 합세했고 하일민 등도 만났다.
민족문학과 예술에 대한 방향을 추진함에 있어 현실 문학에 대한 비판이 없을 수 없었다.
김동리(金東里), 서정주(徐廷柱) 등이 샅샅이 분석되고 비판되었으며 지금은 문자 그대로 진보파의 우상(偶像)이 돼있는 모더니스트 김수영(金洙映)에 대한 날카로운 비판이 끊임없이 제기되었다. 만족스럽지는 않다 해도 신동엽(申東燁)이 오히려 지지되었으며 옛 시인으로는 이용악(李庸岳)이나 오장환(吳章煥) 등이 검토되었다. 임화(林和)는 비판되었다.
한가지 말이 기억난다.
우리 중 누가 먼저 그 말을 꺼냈던가?
그 때 프란츠 파농 얘기가 나왔던가?
프랑스 식민지인 한 태평양쪽 섬에서 태어난 현지 인텔리 여성(女性)이 프랑스 청년과 연애하면서 프랑스 말로 사랑을 나누는 일의 황홀함에 대해서 깊이 감격해하는 걸 비꼬면서 우리나라와 문리대에 있는 서양(西洋)숭배파, 그것도 모더니즘 우파(右派)들에 대한 비아냥 속에 '호모 비아토르(Homo Viator)'란 용어가 튀어나왔다.
나는 물었다.
'비행인간인가?'
조형이 대답했다.
'비슷해!'
'정확히 뭐야?'
'편력인걸!'
'하하하'
그러나 그 무렵 조가경(曺街京)교수의 강의 '실존주의 미학'을 듣고 있던 나는 '호모 루덴스(Homo Ludens)'를 순간적으로 기억해내었다. '유희인간(遊戱人間)'이었다. 그것은 프리드리히 쉴러의 '인간의 미적 교육에 관한 서한'의 테마와 연결된다.
아마도 내 입에서는 더 이상의 악담이 나오지 않았던 것 같다. 왜냐하면 '편력'과 '여행', '변화'는 인정해야 될 새로운 세계적 삶의 한 양식이요 새 차원에서 유물적(遊物的)인 생활양식이 될 것 같았기 때문이었다.
이 예감은 적중했다.
오늘 여기 인간의 삶은 어떤 면에서는 바로 '호모 비아토르'에 다름 아니기 때문이다.
'쟈끄 아딸리'나 '질 들뢰즈'를 보라!
그때 나의 꿈은 고민과 고뇌, 리얼리즘과 민족민중적 미의식과 유럽적인 모더니티와 슈르레알리즘이 통합되는 어떤 새 길에 대한 몽상은 그때는, 전혀 자신이 없었으나, 지금 생각하니 저변에 숨겨진 깊은 까닭이 있었던 것이다.
아!
세월이란 기이한 것이다.
그때 그토록 괴로워하면서도 놓치지 않으려고 노력했던 일들이 이처럼 수월하게 명명백백한 현실로 드러나다니 ……!
조형은 그런데 이 문제에 대해서는 퍽 개방적이고 유보적이었다. 아마도 이런 점, 이런 학술적 확신에서 나온 여유 때문에 나와 그가 짝꿍이 되었을 것이다.
그 후 그와 나는 한 10년 정도 간격으로 한 번씩 만났다. 그러나 나도 그와의 합의를 잊지 않았고 그도 자기의 길을 열심히, 부지런히 간다.
조형을 생각할 때마다 면면히 떠오르는 몇가지 일이 있다.
4·19혁명은 맨 처음 조형의 하숙방에서 모의되었다. 그 모의에서 저 유명한 명문 '4·19선언문'이 이수정(李秀正)씨로부터 나오도록 모의되었고 코스며 책임까지 논의되었다. 그러나 조형은 한 세월 지나기 전까지는 그 일을 입밖에 내지 않았다.
또 조형은 세상이 다 아는 공부벌레다. 강의실 아니면 도서관, 아니면 하숙집이다. 걸음도 바삐바삐 걷는다. 책을 읽어야 하기 때문이다. 얼마나 마음이 바빴으면 그랬겠는가! 친구들에게 학교나 길거리에서 마주치더라도 긴급한 얘기가 없을 땐 인사나 악수까지도 할 것 없이 오른손 검지만 약간 들어서 까딱하는 것으로 간단히 반가움을 표시하자고 제안할 정도였다. 그가 상체가 앞으로 잔뜩 기운 채 바삐 걸어가는 모습을 보면 그의 별명인 '고바우'가 적중한 것을 금방 안다. 그는 바로 '고바우'였으니 '고바우'의 제일덕목은 성실성 아니겠는가!
그는 언젠가 내게 아직 발표 직전의 원고 상태인 신동엽의 '껍데기는 가라'라는 시를 보여주었다. 잡지사 편집원으로 아르바이트를 했기 때문이다.
한 번 읽고난 뒤 감동속에 들어간 우리는 잠시 침묵하였다.
침묵을 깬 것은 조형이었다.
'신동엽은 최고시인이야.
그러나 김지하 앞에서는 아무것도 아니야!'
다만 나를 칭찬해서가 아니다.
친구를 그렇게 존경과 함께 사랑할 수 있는 그의 자질이 또한 당시 동아일보에서 세인의 인기를 모으던 '고바우'의 진지함을 연상케 했다.
조형이 언젠가 내가 시를 발표하고 문단에 데뷔할 때가 되었다고 시고를 달라고 했다. 나도 그 까닭을 알고 '황톳길' '육십령(六十嶺)' 등 6편인가를 주었는데 그가 원고를 보낸 '창비(創批)'는 백낙청과 김수영의 감식(鑑識)을 거쳐 '불가(不可)'하다는 판정을 내린 결과, 원고를 되돌려 왔다.
조형은 이것을 내내 민망해하고 미안해했다.
작년이던가 올해 초던가 듣자하니 백낙청씨가 그때 내 시고를 퇴짜놓은 건 자기 일생일대의 실수라고 어디다 썼다고 한다. 조금 우습다. 뭐 그리 잘된 시(詩)도 아니었는데 …….
또 생각나는 게 있다.
문리대 문학회가 시청각교실에 김수영 시인을 초대하고 조동일형이 발제한 '전통민요와 현대시의 변용'이란 민족시론에 대해서 김수영 시인이 마구 화를 터트리며 '낡아빠진 민요 따위가 어떻게 현대시가 될 수 있는가'라고 조형을 매섭게 공격한 적이 있다.
또 우리가 한일회담 반대투쟁 때에 거적에 누워 장기적인 연좌단식농성에 들어갔을 때 김수영 시인은 어느 신문의 기고문에서 우리의 비전을 '공업화'라고 강조한 적이 있다. 박정권의 한일회담 추진은 사실 일본의 대한보상금과 곁들인 상업차관, 그리고 낡아빠진 중공업 플랜트수입으로 한국경제를 일본중공업의 분업시스템 속으로 편입시켜 값싼 노동력과 원료를 팔아 먹겠다는 것이기 때문에 우리가 저자세 회담을 반대하고 있었던 것이므로 당연한 일이지만 농성현장에서 그 기고문에 대한 상당히 예리한 비판이 쏟아졌다.
또 기억난다.
박정희의 '한글전용론'이 발표, 강행되었을 때 대전 충남대의 박정기 총장 등의 반대 시위가 있었는데도 '창비'는 이에 전적인 찬성을 표시하고 나왔다.
그날 저녁 조형과 나는 학림다방에서 만나 '무식한 사람들!'이라고 화를 터트렸다. 그때 조형의 한 마디가 생생히 기억난다.
'유럽 지식인에게 라틴어를 하지 말라는 것과 같다. 앞으로 한국문화와 신세대의 인문학이나 철학적 사유력에 큰 빈곤이 올 것이다.'
결과는 그대로다.
조동일은 이런 사람이다. 내가 너무 과장하고 있는가? 사실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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