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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지하 회고록 '나의 회상, 모로 누운 돌부처' <1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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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지하 회고록 '나의 회상, 모로 누운 돌부처' <110>

시화

시와 그림, 더 정확히 말해서 그림 안에 시 있고 시가 그림으로 전환하는 동양의 사군자 등 문인화는 내게 있어 하나의 숙명이다.

시도 그림도 그 원리적 근원과의 관련에서 글씨와 밀접하니 '시·서·화'(詩·書·畵) '삼절'(三絶)의 옛 이치는 그 자체로서 진실할 뿐 아니라 역시 내게 있어서는 하나의 숙명이다. 특히 그 미칠 것만 같은 군부 지배의 시대, 강압과 무지한 폭력이 정치의 이름으로 조직화된 시대, 삶과 세계의 뜻을 깊이 알지 못하고 나아갈 방향과 그것을 지도할 지남침(指南針)이나 북극성(北極星)을 아직 갖거나 보지 못한 그 숱한 불면(不眠)의 밤들, 내 인생에 있어서, 술밖에는 달랠 길이 없는 그 샛노오란 얼굴에 쿨룩 쿨룩대는 폐결핵이 차차 깊어져가는, 그래도 술밖에는 방법이 없던 저주받은 내 인생에 있어서 1972년과 73년의 시골과 서울에서의 세차례에 걸친 개인사화전은 시·서·화의 통합을 내게 하나의 숙명으로 만들었으며 또 그렇게 각오하도록 했다.

내 시는 그 무렵에도 모더니즘이나 초현실주의 주변을 맴돌고 있었다. 엘리엇·파운드·오든·스펜더·맥니스·루이스 등의 현대적인 은유 등으로 가득찼고 그 위에 아폴리네에르와 브르통 또는 딜런·토마스 모양의 신화와 상징과 형태와 극채색으로 가득찬 켈트와 같은 환상이 출몰하는 난해시였으며 그 속에, 그 위에, 그 밑에, 그 틈에 그와는 극히 이질적인 서정주·김영랑·김소월 등이 끼어들고 배어들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와는 다른 이들, 예이츠·키츠·셸리 등이 한편에 얼굴을 삐죽이 내밀고 있었다. 괴테나 하이네·헤르만 헤세 등 독일문학의 영향은 별로 없었던 것 같다.

내가 잘 나가던 시내 2층 다방에 30~40점을 처음 전시했다. 둘째번도 셋째번도 다방이었다. 내 삶과 시와 그림의 온갖 잡다(雜多)가 뒤죽박죽으로 다 얼굴을 내밀었다. 그 잡다와 혼돈에 평가가 좋을 까닭이 없었다.

다만 세차례 모두 공통된 평가는 시화(詩畵) 자체의 새로운 장르적 가능성을 열었다는 것이다. 그림의 느낌을 주는 글씨로 시를 쓰고, 그 시의 이미지가 그림과 채색으로 형상화하는 통합적 미의식의 개척이라는 점이 평가의 초점이었다. 글로 그림을 그린 형태시(촛불 모양·海馬·다이아몬드·마름모꼴·나선형의 은하 등)로부터 채색 자체가 적료(寂廖)함을 스산하게 표현하는 단시화(短詩畵)들, 평면 위에 형상성을 가진 '크립토그램'(암호문자·暗號文字)을 접착시키는 것. 수묵(水墨)과 포스터컬러와 아크릴 등을 다종다양하게 접합시켰으니 모든 것은 지난해말 전시한 묵란전(墨蘭展)의 선구적 단계들이었다. 왜냐하면 엄밀히 말해서 나의 시화전(詩畵展)은 한번도 시(詩)와 시적 이미지 중심의 시각적 설명이나 해설이 아니었으니까. 그것은 '시·서·화 통합의 새 차원을 끝끝내 기다리는 하나의 미학적 묵시(默示)였기 때문이다.

"시를 설명하지 말게."
아버지의 동료 되는 한 인쇄업자의 충고.

"채색을 너무 극화시키지 말게, 시의 내면적 이미지가 배어나오지 못하게 장애물이 만들어져 …."
원주중학교의 한 선생님의 지적.

"그림글씨로 시를 써 넣는 것은 글씨 속에 들어 있는 본래의 사상성, 예컨대 한자글씨 같은 것, 이것을 강화시켜 시의 독자적 논리를 제약하는 것 같다."
제1군사령부 탱크부대장의 놀라운 조언.

"시도 죽고, 그림도 죽었어요. 글씨가 다 잡아먹는 것 같아요."
원주 출신의 한 미술대학생의 중요한 한마디.

이 마지막 말이 몇 개의 징검다리를 건너뛰어 오늘의 '시·서·화 통합의 새 차원'을 창조하려는 나의 작업에 예견성을 주었다.

결국 글씨가 시화를 결정한다고 문인화(文人畵)의 근본정신을 말한 추사(秋史)의 지론을 오늘의 맥락에서 다시 검토해 보려 한다.

일산(一山)에서 구기터널을 막 지나 세검정(洗劍亭)쪽으로 가는 길 바로 오른편에 자그마한 찻집 간판이 허공에 달랑 붙어 있다.


'시화'(詩畵)

이런 제목의 찻집이나 고미술가게나 표구집이나 술집을 본 일이 없어 신선했는데 그 글씨가 비틀대며 제멋대로 흘림흘리는 일종의 '예초'(隸草)인지라 '아하! 술집이 주업이로구나'하는 감탄을 던진다.

그 곁에는 '석파랑'(石坡廊)을 흉내낸 '돈파랑'도 있고 큰 판유리 안에 공예품을 전시해 놓은 '무인(無人) 갤러리' 등이 있으며, 교차로에서 오른편에는 대원군의 유명한 별장 석파랑(石坡廊)도 요리집으로 문을 열고 있지만, 그 간판의 모양·글씨·빛깔과 서체(書體), 그리고 그 집의 건축학적 특징과 구조로 드러나는 그 나름의 독특한 기능·특징 등이 그 집 또는 가게의 시(詩)인 바로 그 집 주인의 장사 의도와 화(畵)인 공간 전체의 배치나 축조·배경 등이 '멋진 집'으로서의 새 차원을 열었느냐 어떻느냐는 아예 논의할 만하지 못하다.

그러나 도처에서 그 방향으로 접근하고 있다. 이 역시 시화(詩畵)의 새 예술적 가능성을 지지하는 새로운 미학의 등장이다.

이것이 내 숙명일까.

유홍준의 '완당평전'을 읽으며 한 건물의 현판(懸板)의 횡액(橫額) 글씨의 서체(書體)나 구조가 얼마만큼 눈에 보이고 또는 눈에 안 보이는 차원, 그리고 보이는 차원에서의 '생'(生)과 '극'(克)을, 또한 두 차원의 '아니다'(不然)와 '그렇다'(其然) 사이의 새로운 창조적 차원으로의 소통 및 통합의 감동적 건설에 있어 얼만큼 중요한 것인가를 깨닫고 배웠다.

시화(詩畵)는 동양 문인화(文人畵)처럼 오랜 전통을 가지고 있으면서 새 시대의 새로운 '크립토그램' '문자그림' '새 세대의 결승'(結繩·매듭) 나아가 새 인류(人類) 새 인간(人間)의 '역'(易) 또는 에콜로지적이고 사이버적, 인터넷적인 '새 부호'(符號)를 창조하는 데에 기여할 새로운 예술 장르일 것이다. 세 차례의 시화전(詩畵展)과 옛 시화(詩畵)인 문인화(文人畵)의 묵란전(墨蘭展) 경험이 내게 이러한 예감과 확실한 방향을 감촉하게 한다.

따라서 동양의 문인화·사군자(四君子) 등에서 요청되는 여러 원리들, 어떤 것은 고답적(古踏的)이고 또 어떤 것은 미래지향적(未來指向的)인 혼허(混虛)함인데, 그것들을 옛것이라며 버리지 말고, 새 문화(文化)·새 문명(文明)을 기다리고, 감득(感得)하고, 나아가 그것을 건설하는 이에게 도움이 되도록 대담하게 해석해야 할 것이다.

이 시대에 동북아(東北亞)에 사는 우리에게 긴히 요청되는 것은 중국·한국·일본 등 동북아시아 옛 전통에 대한 현대의 미래지향적이고 대담무쌍하고 파격적인 새로운 '해석학'인 것이다.

그것 없이 동양 문예의 부흥 없고 서양과의 통합 속에서 그 문예부흥을 새 세대 주체의 세계적 대문화혁명으로 이끌어 올리지 못하면 지금의 인간·사회·자연 세 방면이 엇섞인 '대혼돈'(Big Chaos)에 대한 뛰어난 과학적 해답은 영영 불가능할 것이 틀림없다.

나는 난초(蘭草)를 친다.
앞으로는 달마(達摩)도 할 것이다.
그리고 전예서예(篆隸書藝)와 해초서(楷草書)도 할 것이다. 그리고 갈필(渴筆·먹을 조금 묻힌 상태) 따위로 산수(山水)나 초충(草蟲) 등의 스케치, 이른바 흑백(黑白)의 예술인, 왈 '수묵'(水墨)을 할 것이다. 이 문인화를 현대의 새 예술장르로 개척할 생각이다. 이것이 나의 숙명(나의 역사 속에서 이미 정해지고 드러났다. 경험의 축적은 운명을, 그리고 예감을 탄생시킨다)인 '시화'(詩畵)이고 이것이 저 불우했던 시간, 불행했던 여러 나이에 생겨난 일들이다.

수묵은 적료의 예술이다.
앙드레 말로는 소묘(素描)·초기영화·사진 등 흑백(黑白)예술의 밑바닥에 이상한 세계인식으로서의 신화적 우울이 자리잡고 있다고 말한 적이 있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지난 10년여의 나의 병명(病名)은 '종교적 환상에 의한 우울증'이었다.

수묵은 그래서 한편으로는 내게 있어 우울증에 대한 세심법(洗心法)이 된다. 엉터리 변증법 따위가 아니다.

나는 이 2년 동안 수묵으로 사란(寫蘭)을 하면서 한없는 몰두(沒頭)와 자성무화(自性無化)의 경험을 통해서 그것을 안다. 더욱이 현대의 묵란(墨蘭)은 바람에 흩날리는 표연란(飄然蘭)과 엉성하고 거친 소산란(疎散蘭), 그리고 태고무법(太古無法)과 자성무화의 순박함, 무교고졸(無巧枯拙·기교과 없는 서투름)을 지어내는 몽양란(蒙養蘭)이어야 하느니 '허화'(虛和)와 그로부터의 '혼허', 즉 '텅빈 통합' '자유로운 통일' '활동하는 무(無)' 등 그 '중정'(中正)에 있기 때문이다.

정란(正蘭)은 이제 옛 사람들의 그 시절 나름의 단정한 삶의 추억일 뿐이요, '슬픈 인상화'(印象畵)일 뿐이다. 나는 이것을 최근 입수한 옛 난보(蘭譜) 속에서 소통성(疎通性)과 변화(變化)의 극치에 이른 청대(淸代) 노곤봉(盧坤峰)의 혼돈한 표연란과 소산란에서 발견했다. 그러나 이것이 명대(明代)의 '백정'(白丁)이란 이의 일획란(一劃蘭)에 이르면 문제는 아주 심각하다. 나는 요즘 이 문제를 깊이 생각하고 있는 중이다.

<'월간중앙'과 동시연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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