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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지하 회고록 '나의 회상, 모로 누운 돌부처' <1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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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지하 회고록 '나의 회상, 모로 누운 돌부처' <109>

스승

불교 최대·최고의 경전은 화엄경(華嚴經)이다. 화엄경은 공부하는 이야기다. 선재동자에게 있어 온갖 것, 온갖 사람이 모두 스승이다. 바로 이 사상은 내 젊을 적에 부닥친 여러 지혜 중 가장 놀라운 것으로 뒷날 감옥에서 해월(海月) 최시형(崔時亨) 선생이 고도로 압축된 간결한 표현으로 "나는 모든 사람, 모든 일에서 다 배운다. 어린이와 아녀자에게서도 배울 것이 있으면 배운다"고 하였다.

내 일찍이 대학 전에 그러한 뛰어난 사상을 안 것은 아니지만 어찌된 것인지 내게는 스승이 많았다. 부모님과 친척 어른들은 물론이고 로선생·영채형·만열이·봉흥이·내수, 그리고 학교의 여러 선생님들과 그밖의 여러 벗들과 온갖 사건들, 온갖 풍경들마저 모두 스승이었다.

심지어 창녀마저 내 스승이었으니 어느 때던가 '장미'라는 이름의 예쁜 창녀는 내게 웃는 얼굴로 농담처럼 "훌륭한 사람은 공씹을 하지 않는다"고 가르쳤다. 그것이 훌륭한 사상이라고 확인한 것은 오랜 훗날 원주의 무위당 장일순 선생이 원주의 어떤 유명한 건달 오입쟁이를 상대로 벌인 다음과 같은 가톨릭 교리문답에서였다.

"선생님, 저는 성당에는 나가고 싶지만 오입을 안 할 자신이 없어서 망설입니다."

"임마! 오입을 안하고 애덕(愛德)을 베풀면 되잖아!"

"애덕이 뭡니까? 사랑 말입니까?"

"그래, 사랑이지. 창녀에게 베푸는 애덕이란 돈주고 오입하는 것을 말해!"

"돈 주고 오입하면 성당에 나갈 수 있습니까? 그것도 오입은 오입 아닙니까?"

"임마! 해보면 알아."

그 건달님은 돈에는 아주 독한 '짱아'이어서 돈 주고 오입할 생각을 하니 이미 그 순간에 오입 생각이 삼천리는 멀리 달아나 버렸다는 얘기. 그래서 겨우 턱걸이로 가톨릭에 입문(入門)해 드디어 영세를 받았다는 얘기는 지금도 원주에 내내 내려오는 하나의 전설이다.

창녀 '장미'의 가르침은 그보다 10여년이 먼저였으니 지혜의 내용으로 본다면 무위당보다 먼저 간 선지자(先知者)요, 화엄경에서의 선재의 스승인 그 창녀의 직계혈통이라 하겠다.

나에겐 그 중에도 뚜렷한 몇 분의 스승이 있었다.

아주 어렸을 적에 사물의 기초적인 이치를 가르친 것은 저 유명한 빨치산 로선생이었고, 내게 문학을 가르친 이인순 선생과 민족문학에 눈뜨게 해준 문리대적의 친구 조동일 학형, 헤겔변증법을 속속들이 알게 해 준 철학과의 윤노빈(尹老彬), 그리고 1960년대, 70년대부터 돌아가실 때까지 늘 모시고 살았던 무위당 장일순 선생님은 삶의 이치와 역사, 사회, 종교와 정치, 대인관계에 관한 몽양과 간디·비노바 바베 등의 뚜렷한 가르침을 전해 주신 명명백백한 나의 스승이셨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제 와서 지난 날을 되돌아볼 때 성성하게 환한 빛으로 내 뇌리에 확고히 인화된 한분 스승을 들라면 역시 대학적의 김정록(金正祿) 선생님이시다. 왜 그럴까. 왜 그분일까. 김선생님은 본디 옛날의 저 유명한 재상 김홍집(金弘集) 선생의 손자 되시는 분으로 젊은 시절 그 엄혹한 일본 제국주의 시절에 베이징대학(北京大學) 국학과(國學科·中國學科)에서 중국학(中國學), 이른바 동양학(東洋學)을 공부하셨고, 또 저 유명한 곽말약(郭沫若) 선생의 제자이셨다.

선생님은 문리대로 옮겨간 미학과에서 동양미학과 동양예술사·미술사 및 사상사를 가르치셨다. 나같은 엉터리 지식인이 그래도 동양에 대해, 중국과 동북아 사상과 문학·예술에 대해, 예술과 노장학(老莊學)의 관계, 회화기법으로서의 '훈'(暈·달무리처럼 먹과 채색을 둥글게 번지게 하는 것)과 '염'(染·묽은 먹을 먼저 칠하고 나중에 짙은 먹을 내려 뽀얗게 번져가게 하는 것) 혹은 '묵산'(点山)과 '운산'(雲山), '준법'(?法) 등을 여러 모로 말하고 몽양과 '일획'(一劃)을, 주역(周易)과 사서(四書) 등을 떠들게 된 것도 모두 선생님의 가르침을 여러해 거듭거듭 들어온 덕이다.

그 선생님께서 내게 관심을 보여주신 것이다.
나는 정치적 반동의 시절에 가난과 흉년이 겹치고 겹친 위에다 거듭된 휴학과 명정(酩酊)의 탐닉, 짝사랑의 실패, 폐결핵, 삶의 의미와 죽음의 유혹에 대책없이 열려 있게 마련인 스물하나, 스물둘의 그 위험한 시절에 원주의 비좁은 단칸 셋방에서 뒹굴며 숱한 밤의 불면(不眠) 속에서 무척이나 괴로워하고 있었다.

나는 무슨 생각에서였던지 어느날 아침 갑자기 선생님께 편지를 썼다.
괴롭다는 것이었고, 죽고 싶다는 것이었으며, 어찌하면 벗어날 수 있으며 도대체 삶이란 것은 무엇인가에 대한 숱한 질문과 절절한 고백 등이었다.

아!
기억에도 생생하다.
집앞 울타리 건너편의 키 큰 오동나무 위에서 아침까치 두 마리가 번갈아 지저귀고 있던 어떤 한 날 오전 무렵, 나는 선생님의 답장을, 열장이 넘는 그 자상하고 친절한 스승의 가르침을 받고 방구석에 내 나름으로 몸과 마음을 '정좌'(正坐)하고 나서 떨리는 손으로 피봉을 가만히 뜯었었다.

"체관(諦觀)만이 해결의 길일세.

체관이란 그리 쉬운 일이 아니니 용기가 필요하다네. 용기 또한 그리 쉽게 얻어지는 것이 아니니, 어른들이나 옛 사람들의 가르침이 그래서 필요한 것일세. 노자(老子)로부터 배우게. '허'(虛)라는 것은 그냥 '허무'가 아닐세. 그것은 참다운 용기의 근원이요, 체관의 문(門)이라네. 체관이 곧 삶의 참된 문이니, 지금 곧 서점에 가서 '노자, 도덕경'을 사다 잠이 안 올 때마다 읽고 또 읽도록! 아마도 그 책 반을 채 못 읽어 잠이 올 것이네!"

잊지 못한다.
대학 시절 그처럼 몰두했던 헤겔·칸트·하이데거와 베르그송이 결코 나에게 철학적 해결을 주지 못했고 마르크스는 더욱 더 내 인생과 삶의 진정한 길잡이가 될 수 없었음을 기억할 때마다 소록소록 기억나는 것이 바로 노자였고 노자보다 더 깊고 간절한 선생님의 그 편지, 그 엄정함과 자상함으로 가득찬 가르침이었다.

그날 밤, 책의 절반을 채 읽지 못했을 때 잠에 골아떨어졌으니 과연 마술인가? 허나 그런 처방이 아니었다 하더라도 선생님의 편지 한 통으로서 나는 인간과 세계에서 버림받지 않고 그에 연결되며 그에 소속되며 그에 의해 반기는 바 되었으니, 바로 김 선생님은 나를 한번 세상 밖으로 끌어냄으로써 도리어 세상 속에 제대로 편입시켜 줄 것이다. 나는 진정한 스승을 모신 내 인생을 비록 실패였다 할지라도 실패로 승인하고 싶지 않다.

<'월간중앙'과 동시연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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