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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지하 회고록 '나의 회상, 모로 누운 돌부처' <1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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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지하 회고록 '나의 회상, 모로 누운 돌부처' <107>

거지

남들은 4년에 졸업하는 대학을 나는 7년 반이나 다녔다. 낙제를 한 것도 아니고 공부를 그만큼 열심히 한 것도 아니다. 단지 휴학을 자주 해서다.

등록을 포기해서도 휴학한 일이 있지만, 나는 학점이 좋아서 등록금이 거의 면제되는데도 휴학한 적이 몇번 있다. 한번은 재입학까지 한 적이 있다.

일종의 방랑벽 때문이었는데 휴학을 하고도 꼬박꼬박 강의를 들어서 교수나 학생, 그리고 과의 조교 등이 깜빡 착각한 일도 두세번 있다.

원주 근처나 목포를 방랑하지 않으면 학교와 학교 근처를 강의실에서 강의 다 듣고 도서관에서 책 실컷 빌려 읽고 술집·밥집에서 친구들에게 내내 얻어먹고 얻어 마시며 신나게 방랑한 적도 여러번이다.

친구들이 항용 하는 말이다.
'천재거나 도둑이거나 ….'

그러나 사실 내게 더 아픈 별칭은 '거지'였다.
집에서 돈이 안 올 때가 종종 있었다. 그리고 술을 마시고 싶은데 물주가 나타나지 않을 때, 친구들 가운데 마음씨 좋고 여유있어 뵈는 애들에게 손을 벌리곤 했다.

그들 중에서도 유난히 지금 이 순간까지 기억에 남는 친구가 한 사람 있다. 유명한 미술품 수장가 간송(澗松) 전형필 선생의 막내아들로 지금은 간송미술관(澗松美術館) 관장으로 있는 전영우(全英祐)형이다. 나와는 미술학교 동기생으로 회화과에 다녔지만 매일 만나고 돈을 꾸어주되 매일 따로따로 놀았다. 아마도 그에게는 내가 지겨운 친구였을 것이다. 친구나 후배 여학생들에게 돈을 빌리며 꼭 말미에 붙이는 관용구가 있었으니 어김없이 갚아준다는 말이었다. 그게 언제냐고 묻는 예가 있을 때는 누구에게나 똑같은 한마디가 준비되어 있을 뿐이었다.

"통일되는 날 삼천만에게!"

그랬다.
그래 매일 얻어 먹고 얻어 마시면서도 열심히 강의 들었고 열심히 책을 읽었고 열심히 시를 썼고 열심히 돌아다녔으며 그보다 훨씬 더 열심히 밤새워 떠들며 토론하는 것이 나의 일상이었다.

'거지!'
그렇다.
분명히 단언하거니와 나는 대학생때 '거지'였다.

그러나 막상 누가 나더러 '거지'라고 부르면 매우 기분나빠 했다.
훗날 낙원동의 '탑골'이라는 단골술집에서였다. 술에 잔뜩 취한 저 유명한 '리영희'(李泳禧) 선생이 여럿 앞에서 나더러 거지라고 부르며 학생때 내가 거지였다고 까발린 적이 있었다.

그때 나는 몹시 화를 냈다. 입만 열면 프롤레타리아요, 혁명 운운하는 사람이 '거지'라는 말에 모욕적인 의도를 담아 공중 앞에서 창피를 준다는 일이 더욱 기분 나빴던 것이다.

순식간이었다.
내 입에서 반격이 봇물처럼 쏟아졌다.
"배고프고 술고파 손 내미는 거지는 거지가 아니지요. 진짜 상거지는 사상의 거지겠지요. 리선생이야말로 상거지! 논문마다 미 국무성, 미 국방성, 뉴욕 타임스, 르 몽드, 인민일보(人民日報), 신화사(新華社) 통신에다 일본 공동(共同)통신, 아사히, 마이니치, 아카하다, 노동신문 몇면, 누구 누구 필자 운운 빼놓으면 쓸거리가 없는 게 리선생님 아니신지요? 상거지라는 건 그런 불치(不治)의 정신적 거지를 말하는 거지, 나같이 배고프고 술고픈 진짜 프롤레타리아를 말하는 게 아니지요. 하하하하하!"

내가 생각해도 너무했다.
평소 리선생은 내게 한반도 주변의 첨예한 국제정세에 관한 여러 가지 조언과 예상을 주었으니 내 태도가 역시 나빴다.

거지란 건 사실이었고 또 자업자득 아니던가!
그럼에도 불구하고 듣기 싫었으니 확실한 것은 머지않아 내가 거지 근성을 분명히 졸업하기는 할 거란 사실이었다.

그러나 졸업 후에도 요양원에 들어가기까지의 몇 개월 동안은 명동이나 충무로 혹은 '중앙일보' 뒷골목이나 대학로 '학림다방' 같은 곳에서 폐결핵으로 쿨룩쿨룩거리며 노오란 얼굴을 하고 앉아 만만한 물주를 기다리며 몇시간이고 죽치고 있기 일쑤였으니 …….

'내 꼴이 똑 이용악(李庸岳)이로구나!'
월북시인 이용악은 거지시인으로서 술이 고플 때에는 종로 보신각 앞에 우뚝 서서 물주가 나타날 때까지 몇시간이고 기다린 것으로 유명한데, 그렇게 혼자 중얼대면서도 쉽사리 그 자리를 뜰 수 없었으니 그렇게 해서 얻어먹는 술자리에서 나의 일거수 일투족은 또 얼마나 밉상스럽고 천덕스러워 보였을지 알 만하다. 알 만하고 또 그래서 리선생의 취중발언 '거지론'도 충분히 '리해'(理解)할 만하고 또 '료해'(了解)할 만하다.

<'월간중앙'과 동시연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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