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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지하 회고록 '나의 회상, 모로 누운 돌부처' <1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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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지하 회고록 '나의 회상, 모로 누운 돌부처' <106>

가난

내 앞에, 내 안에, 내 벗들에게 '가난'이 살고 있었다.

5월 쿠데타의 주체들 앞에, 그들 안에, 그들의 동맹자들에게 '가난'이 살고 있었다.
'가난'은 그 시대 최대 최고의 숙제였다.

나라도 어찌하지 못한다는 가난!
가난이 우리를 지배하고 있었다.

우리 모두가, 우리들 어느 누구도 찬성하지 않았던 5월의 군부 쿠데타가 슬그머니 시인받게 되었던 것도 가난 때문이었다. 가난에 대한 그들의 관심 때문이었다. 그러나 역시 그것은 폭력이었고 오류였고 부채였다. 돈 닷냥에 어미를 팔아먹은 놈 꼴이었다.

'가난.'
그것이 어쩌면 내 청춘의 생각과 시의 출발점이었다. 마치 한 초현실주의자에게 있어 환상과 시가 정신의 결핍과 억압된 무의식으로부터 터져나오는 '자동기술'(自動記述)인 것처럼.

만약 여유가 있다면, 내 시의 비트들을 한번 분석해 봐라! 거기 틀림없이 어떤 허기진 영혼이 노래부를 때 어김없이 함몰되는 음악성의 지옥인 하나의 '에어포켓' '블랙홀', 즉 비트의 숨가쁜 언덕오르기가 나타날 것이다. 그래서 헉헉거리며 순간 순간 '제로에' '무의미'(無意味)에, '침묵'에 빠져든다. 이것이 무엇일까? '여백'이요, '틈'인가?

아니다.
나는 그것을 잘 안다.
알지만 꾸준히 외면해 왔다. 이 '외면' 자체가 하나의 큰 '가난'이지만.

내용이 아니다.
정신보다 더 깊은 영(靈)의 가난은 내용이 아니라 형식에서, 형식보다 더 깊은 장단, 호흡에서 기어나온다.

―비트가 아니라 장단(長短)이긴 하지만, 비트라는 심작박동의 뜻을 비친 까닭이 있다. ― 이것을, 어느 때던가, 허수경이라는 시인은 몸과 마음사이의 '입술'이라고 표현했는데, 바로 그 입술이 내용과 형식 사이에 있는 영의 호흡, 가난과 배부름을 표현하는 장단이다 ― 그것이 가난할 때 장단이 아니라 비트가 된다! ―바로 그 장단을 내 시에서 한 번 분석해 보라! 그 생성체계 안에 그 무렵, 청춘기의 내 삶의 내면 ―아니, 외면과의 복합적 삶의 내면적 반영으로서의 영적 상황 ―의 가난, 사랑 결핍, 눈물, 뒤죽박죽된 동경의 좌절과 수음(手淫)의 죄의식, 뼈를 깎는 외로움, 지옥과도 같은 권태의 고통, 잠 못 이루는 밤의 아편 같은 몽상과 그때의 뭇유령들, 뭇마구니들의 모습이 확연히 드러날 것이다.

일본의 어느 한 문학평론가는 민중문학과 민중사의 미래를 '원령사관'(怨靈史觀)에서 찾자고 한 적이 있다. 우리 쪽에서 말한다면 '한문학'(恨文學)이요, '한사관'(恨史觀)이다.

아마도 칼 융쪽에서 접근한다면 '그림자론'(論)이 되는데 그보다는 '그늘론'(論)이 한결 본격미학이요, 더 학술적으로 들어간다면 도리어 '율려학'(律呂學)이 정확하다. 율려의 장단 안에서 넋이 흔들리는 것, 음과 양의 순환의 저 안쪽의 차원, 그것이 곧 '그늘'이니까.

그것을 '입술'이, 허수경의 그 입술이 바들바들 떨면서 말한다고 생각해 보라! 그 '가난'을!
짐작할 수 있겠는가?
내용은, 사유와 이미지와 의미와 감각들은 다 그 위에서 춤출 뿐이다.

독단인가?
그렇지 않다.
바로 그 '가난', 그리고 그것을 드러내는 '입술'이 되는 왈 '율려', 그 '율려'의 감각적 표현인 '그늘', 그러나 그 이전에 그 모든 것의 밑바닥에서 흔들리는 일종의 '제로'가, '허공'이 있었음을 기억하라!

'에어포켓' 같은 '침묵'과 '정지'와 '툴'이 있다고 했다.
'빈집' '빈방' '눈부심' '그늘'!

그렇다.
이 모든 것이 삶과 시의 주체다.
그리고 그것이 바로 '지옥'이다.
실은 초월의 흰빛!
평화, 창조, 완성, 해탈, 초신성(超新星)과 같은 이 모든 좋은 것들이 처음 태어나 성장하는 블랙홀이 바로 이것.

헉 ―
하고 김이 빠져서 기(氣)가 무너져내리는 한순간의 판단정지인 '무'(無) '공'(空), '허'(虛)이다.
일단은 이것들이 '가난'의 또 하나의 밑바닥이자 가난의 시적 반영이다.

가난하고 불행한 사람들은 궁지에 몰리면 입을, 눈을, 모든 감각을 닫아 버린다. 일종의 방어기제인데, 이것이 동물적인 생명기제인 것이다. 바로 이것이 가난의 출처다.

바로 이것을 내 시에서(또는 다른 시인의 시, 다른 사람의 삶과 예술과 논리에서) 찾아낸다면 이것은 이제는 그와는 정반대로, '여백'과 '틈'이 될 가능성, '소통'(疏通)으로 발전할 한 근거가 된다.

그래서 '흰빛'의 출생지, 그 자궁은 오히려 시커먼 '블랙홀'이다.
만약 '율려'에서 이것이 그 밑바닥에 깔려 있지 않다면 그것은 그저 리듬과, 그 리듬을 제어하는 '메타'나 '과일'같은 시학적 밸런스 기능밖에 안남을 것이다.

그것이 중요하기는 하다.
그리고 '그늘' 자체가 창조임을 인정한다. 그러나 그런 범박한 일반론으로 시가, 예술이, 철학이, 그리고 무엇보다 준엄한 나날의 바른 삶이 이 험상궂은 '빅·카오스'의 시절에 그 무엇을 날카롭게 반영하며 그 무엇을 참으로 새롭게 창조하며 그 무엇을 진정한 차원에서 돌파할 수 있단 말인가? 그리고 더욱이 마침내는 완성할 수 있단 말인가?

바로 이 '가난'!
그리고 그 때문에 나타나는 텅 빈 '무'(無)로부터 '눈부신 외로움', 즉 '흰 그늘', 가령 김일부(金一夫)의 '정역'(正易)에서의 '신화율려'(神化律呂) 같은 것, 줄여 말하자면 '율려의 창조적 차원 변화인 신인간(新人間)의 신문화(新文化)'가 나타난다.
이것이 참된 초월성이요, 진정한 '빛'일 것이다.

그 옛날 짙푸른 '斯白力'(시베리아)의 허공에 살았다는 '외로운 변화의 신'(獨化之神)일 것이다. 그러매 여기엔 인간의 용기있는 창조적 응시와 개입과 변형이 필요하다. '가난'을 '창조'로 바꾸는 것은 '과거의 잘못을 깨우침(覺非)'이라고 부르는 용기와 결단일 것이다. 도연명(陶淵明)의 그 '각비'(覺非) 말이다.

3∼4년전 'IMF' 전까지만 해도 여러 사람들이 그래도, 아무리 파쇼적이었다 해도, '가난'을 물리치는 경제적 변혁을 해낸 것은 역시 박정희였다고 믿고 말했다. 나 역시 조금은 거기에 찬성하는 쪽이었다. 그만큼 우리의 삶은 가난하고 고단하고 의지가지할 데가 없었으니까.

그러나 IMF 직후부터 우리 경제의 구조원리 소위 '대마불사'(大馬不死) 따위 신화들의 내용을 뒤집어보기 시작한 결과 우리 경제와 사회의 가장 큰 엉터리 구조가 박정희 때부터 시작된 관치금융, 정경유착 등 소위 '가난에 대한 가난'이었음을 확실히 알게 되었다.

IMF 는 박정희때 시작된 환란이다. 나는 작년 어느 계절 어느 날엔가 서울시청 입구 계단 앞에서 홀로 '1인시위'(一人示威)를 하고 있었다. 지나가는 사람들이 자꾸만 흘근흘근거렸다. 나는 내심으로 똑똑히 '가난하지 않게' 혹은 '가난의 밑바닥을 뒤집으며'라고 가슴 속에서 혼자 발음했다.
'그린벨트로 산림을 보호한 것 이외에 박정희가 한 일은 하나도 없다.' 그의 이름은 '가난의 가난', '가난에 대한 또 하나의 가난'이다 라고.

그리고 '나 또한 그 가난에서 벗어나기 위해 여기 혼자 서서 피케팅을 한다'고.

<'월간중앙'과 동시연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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