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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지하 회고록 '나의 회상, 모로 누운 돌부처' <1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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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지하 회고록 '나의 회상, 모로 누운 돌부처' <104>

귀향

학교는 문을 닫았다.
그리고 캠퍼스에 군대가 진주하였다. 민통 간부들과 집권 민주당, 그리고 혁신계 정치인들은 모두 구속되었고 자유당계 부정선거 책임자들에게는 사형이 집행되었다.

민족일보가 폐간되었고 언론들은 일제히 숨을 죽였다. 살벌한 시절이었다.
사람만이 아니라 하늘과 땅까지도 숨을 죽이는 듯 했다.
쿠데타.
이른바 반동이란 이런 것이었다.

서슬푸른 혁명검찰이 마구 칼을 휘둘렀다. 그때의 그 무시무시한 혁검부장 박창암(朴蒼巖)!

나는 최근 그 박창암 선생을 만나 여러 가지 얘기를 들었는데, 첫째로 그가 본디 몽양 선생의 제자였음을 알고 놀랐고 둘째, 그 몽양 선생과 함께 해방 직후 월북하였는데 그때 몽양과 김일성 사이에 남북의 군사전문가들 모두를 묶어 민족군대를 만들자는 협약이 있었다는 것을 듣고 또한 놀랐다. 김일성이 이 협약을 배신하자 인민군에 속해 있던 박 선생은 즉시 월남하여 국군 특수전 전문가가 되었다는 것. 셋째는 6·25때 지리산 빨치산을 한 사람도 살해하지 않고 마오쩌둥(毛澤東) 전법을 활용하여 대거 귀순시켰다는 것. 그리고 박정희의 근본적인 반혁명성(反革命性)을 파악하고는 또 하나의 쿠데타로 그를 몰아내려다 도리어 역(逆)으로 당했다는 것 등.

박 선생은 말을 계속했다.
"혁검에서 민통 간부들을 직접 다룬 건 나였죠. 내가 윤식·유근일·이영일 등에게 물었지. 지금까지 몽양, 백범, 그리고 박헌영이 월북했다가 김일성이한테 뒤통수를 얻어맞고 당했는데 자네들은 그렇게 안 당할 자신이 있는가?

북한 노동당의 오랜 공산주의자들보다 더 철저하게 사회혁명을 실천할 수 있는 이념적·조직적·정치적 자신이 있는가? 그 사람들 별로 신통한 대답을 못해요. 그래 공부 더하고 더 능력을 배가하라고 석방시키고 복교시켜줬지요. 나는 그 무렵 박정희에게 당해 징역 살다가 석방된 뒤 시골에서 농장을 했지요. 김신조 애들 넘어왔을 때 김형욱이가 와 하도 사정사정을 해서 할 수없이 전국적인 예비군 조직을 만들도록 도와줬지요. 그러나 그런 것으로 뭐가 되는 건 아닙니다.

우리 민족에게는 우리 민족 나름의 독특한 사상이 반드시 살아나야 합니다. 이것이 가장 핵심적인 통일과 참된 혁명의 본이지요. 그것이 바로 '홍익인간'(弘益人間)입니다. 나는 그래서 5·16 이후 이제까지 단군(檀君)운동을 하는 겁니다."

꽃들이 지고 계절이 가고 있었다.
나의 짝사랑, 그 애틋했던 사랑도 가고 혁명도, 그 순결했던 혁명도, 세계 현대사에 새로운 에포크를 만들어낸 학생 주도의 그 새 타이프의 혁명도 가고 없었다. 선배인지 동료인지 후배인지는 모르겠으나 그 무렵 한 대학가의 음유시인의 시에는 이런 유행가같은 구절이 있었다.
"계절도 사랑도 혁명도 가고 …."
함께 미학과를 다니던 한 라디오 드라마 작가의 주제가에도
'아, 청춘도 사랑도 다 마셔버렸네,
그 길에 마로니에 잎이 지던 날….'

그러나 그 무렵 나의 고통은 낭만이 아니었다. 하물며 감상(感傷)은 더욱 아니었다. 잎새빛 짙어가는 초여름 한낮 눈부신 땡볕 아래 나는 내 고향 목포의 한 부두에 혼자 우뚝 서 있었다. 대낮에 식은땀을 줄줄 흘리며 입에서는 가끔씩 핏덩이를 뱉어내며…. 브리지의 한 간판에는 '땅끝행'이라고 행선지 표식이 있었다.

땅끝!
이 세상의 끝! 이 지구의 끝!
그런 곳이 정말로 있는 것일까?

땅 끝에 가고 싶다.
가서 이 목숨을 이제 그만 접고 싶다.
내겐 살 이유가 별로 없었다.

이제 막, '자의반 타의반'(이 말도 한때 김종필의 용어였지만) 내 안에 싹트기 시작했던 혁명과 통일에의 꿈이 한꺼번에 잘려 나가고 폐결핵은 심해지고 고향은 이제 고향이 아니었다. 기억이 생생하다. 그때 내 가슴에 들끓는 노래가 하나 있었으니,

'고향에 고향에 돌아와도
그리던 고향은 아니러뇨
산꿩이 알을 품고
뻐꾸기 제철에 울건만
마을은 제 고향 지니지 않고
먼 항구로 떠도는 구름
오늘도 묏 끝에 홀로 오르니
흰 점꽃이 인정스레 웃고
어린 시절에 불던
풀피리 소리 아니 나고
메마른 입술이 쓰디쓰다
고향에 고향에 돌아와도
푸르른 하늘만이 높푸르르다.'

정지용의 시에 김순남이 곡을 붙인 '고향'이란 노래다.
'먼 항구로 떠도는 구름
메마른 입술이 쓰디쓰다.'

나. 나였다.
열네살 무렵 떠났으니 12년만의 귀향일 것이다. 쫓겨나듯 억지로 떠나온 고향인지라 더욱 쓰라리고 쓰디썼다.

더는 못살고 뿌리뽑혀 흘러가버린, 잃어버린, 먼 항구로 떠도는 구름이 되어버린, 그래서 더욱 메마른 입술이 쓰디썼다.

<'월간중앙'과 동시연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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