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통'은 대규모 시위를 벌였다. 1961년의 그 봄, 그때의 구호는 유명한 것이었다.
'가자, 북으로!
오라, 남으로!
만나자, 판문점에서!'
'민통'은 남북통일을 위한 남북 대학생 간의 판문점회담을 제안하고 있었다.
한국 전체가 흔들흔들했다.
심한 동요였다.
숱한 사람들이 불길한 예감에 몸을 떨었다. 원주기독회관에서 초청강연을 하신 함석헌 선생은 잘라 말했다.
"1961년!
올해가 그냥 넘어가지 않는다!
반드시 무슨 일이 일어날 것이다.
그것에 대비해야 한다."
붉은 빛을 띤 스포트라이트가 흰 머리, 흰 수염, 흰 두루마기의 함선생 모습 위에 집중되었다. 그 클로즈업된 함옹의 모습 속에서 어두운 국방색의 군인들이 줄을 지어 저벅저벅 걸어 나오고 있었다. 모두들 집총·착검 자세로! 마치 선교사 '이발소'의 엽총 구멍처럼 시커먼, 시커먼 총구멍들을 들이대면서! 혹시는 미국? 혹시는 CIA?
마지막이 오고 있었다.
모두들 그렇게 예감하고 있었다. 6·25의 피투성이 기억이 4·19의 그 불꽃을 가만히 놔둘 수 없다는 거였다.
마지막이 오고 있었다.
빨갱이만은 안된다는 것이었다.
어떤 면에서는 '사상계'(思想界)까지도 그랬다.
마지막!
며칠 남아 있지 않았다.
그때에야 비로소 나는 민족통일에로 한걸음 성큼 다가섰다.
외우(畏友) 조동일(趙東一) 형이 예정되어 있는 판문점 학생회담에 민족예술과 민족미학 분야에서 자기와 함께 나를 남한 학생대표 두 사람으로 선정, 밀어붙인 것이고 지도부가 이 안을 승인한 것이다. 저쪽 북한에서는 김일성 대학에서 역시 두 사람이 오기로 돼 있었다.
민족의 예술 및 미의식(美意識)의 역사의 발견과 외래의 식민주의적 예술·미학에 대한 비판이 주된 내용이었다.
나는 이미 이 무렵에 마지막을 예감하고 있었다. 함석헌 선생만이, 장일순 선생만이 아니다. 중요한 것은 나의 아버지, 돌배씨, '석주'(石舟) 선생의 판단이었다.
"위험하다.
반동이 오고 있다.
피해라!"
그러나 나는 그 판단을 믿기 때문에 도리어 대표선정을 승낙했다. 왜? 또 다시 '그럼에도 불구하고'? '내가 하는 일은 언제나 마지막에 가서다.'
'문화·예술쪽에서 조직이 아닌 개인으로 참가하는 것'
이것이었다.
'실패할 줄 알면서도 죽임의 자리에로 성큼성큼 나아가는 것.'
그것이 나의 마지막에서의 참가였다.
그날 밤.
1961 년 5월15일 밤.
민통 대변인이었던 광주 출신 정치과 이영일(李榮一)은 낙산 밑에 있던 나의 하숙방에서 나와 함께 자고 있었다. 새벽에 총소리가 연발하는 것을 듣고 이영일(李榮一)은 확신에 차서 말했다.
"우리 편이다. 군부 안에 있는 우리 편이 쿠데타를 일으킨 것이다."
나는 마당에 나와 하늘을 쳐다보았다. 잿빛인데 이상스레 핏빛으로 보였다.
다만 착각이었을까?
다만 착각이었을까?
아아, 그 핏빛!
'반동이 오면 또 싸워야지!'
조풍삼의 그 말,
'반동이 오면 또 싸워야지!'
<'월간중앙'과 동시연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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