통일과 혁명에 대한 젊은 군중적 정열의 참모부요, 대중적 민중행동의 '다이나모'는 서울대학교 중심으로 전국 대학에서 조직된 '민족통일연맹', 소위 '민통'이었다.
'민통'의 격발로 한국사회에서 6·25 이후 죽어버렸던 정치적 정열이 되살아났고 '민족일보' 등과 함께 민족통일혁명의 혁신계 운동이 불꽃처럼 타올랐다.
나는 그 무렵 대학가 '별장다방'에서 많은 친구들과 자주 토론을 벌였고 다음 해에 사고로 죽은 저 유명한 고석원(高錫元) 선배로부터 하이데거와 사르트르와 마르크스 등에 관해 이제까지 전혀 몰랐던 깊은 철학적 세계의 몇가지 얼굴들을 가끔씩이나마 들어서 알게 되었다.
서울대학교 문리과대학은 무수한, 그러나 저마다 개성이 다른 온갖 낭만주의자들로 붐볐고 그들의 목청높은 토론 진행으로 밤낮 시끄러웠다. 마치 백화제방, 백가쟁명이었다.
마르크스에서부터 최수운(崔水雲)·최한기(崔漢綺)에 이르기까지, 단군에서부터 석가·공자·노장(老莊)과 예수에까지, 레닌에서부터 농업사회주의의 사회혁명당 마프노까지, 발레리에서부터 브레히트까지, 정지용으로부터 서정주, 김기림에서 임화, 마야코프스키에서 예세닌까지. 그리고 마티스·피카소에서 시케이로스·리베라까지. 샹송과 재즈에서 민요·판소리·무가(巫歌)와 정악(正樂)에까지.
다 있었다. 없는 게 없었다.
그러나 근본적으로 중요한 것이 없었다.
통일, 또는 통일철학, 그것이 없었다.
통일이 없었으니 자연히 창조가 없었다. '고석규'던가 누구던가 하는, 요절한 한 철학자의 '초극'(超克)이라는 책에 관한 이상한 소문만이 무성했고 그밖에 한마디로 잘라서 우리 손에 의해 창조된 문학도 철학도 과학도 없었다. 번역도 충분하지 않았고 읽을 책도 외국어 원전(原典) 외에는 별로 없었다.
나는 '민통'의 좌파들과 끊임없이 떠들고 싸우고 함께 마시고 함께 뒹굴고 함께 괴로워했다.
그러나 그들의 끝없는 요청에도 불구하고 민통 조직에는 단연코 가담하지 않았다.
아버지의 영상, 월출산을 하산하던 중 가을 코스모스가 만발한 벌판에서 한없이 우셨다는 아버지의 그 슬픈 영상이 내 머리와 심장 위에 우뚝 버티고 있었기 때문이다. 술에 취하면 내게 '민통' 가입을 권하는 그들에게 항용 모욕을 주기 일쑤였다.
'어이! 말세비키들!'
'이봐, 말로당원들!'
그리고 그 중에서도 그들을 가장 불쾌하게 만들었던 나의 모욕성 발언은 이것이었다.
'민통이 두통이야!'
<'월간중앙'과 동시연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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