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해 겨울 나는 세번째 연극에 들어갔다. 중앙 중·고등학교가 주관하고, 당시의 집권당이었던 윤보선·장면 정권과 동아일보가 지원하는 '인촌 김성수'가 그것이다. 역시 중앙고 출신의 김기팔씨가 각본을 쓰고 KBS 사장을 지낸 적이 있는 최창봉 선생이 연출을 맡았다. 최불암·이로미씨 등이 출연하고 나는 단역인 고하(古下) 송진우(宋鎭禹) 역을 맡았다.
중앙학교에서 연습을 하고 그 인근 동네에서 민박으로 합숙을 했는데 나는 최창봉 선생과 한 방을 쓰게 되었다. 당시로서는 일종의 관변연극인 셈이어서 돈은 풍부하게 돌았다.
매일 술이었다.
연극보다 술먹기 연습을 하는 듯했다.
그 연극은 내게 세 가지의 못 잊을 기억을 남겼다.
하나는 연습 도중의 회식시간에 당시 동아일보 회장이었던 김상만 선생으로부터 고하(古下) 송진우(宋鎭禹) 선생의 기행(奇行)들, 알려지지 않은 사적(私的)인 이야기들을 많이 들었고 인촌을 비롯한 한민당의 정치사적 의미, 친일이면서도 민족주의적인 저 기이한 인촌과 고하와 설산 등의 복잡한 정치학을 그날 이후 여러 선배들로부터 듣게 되었다.
스무살의 나이에 이 나라 근대사의 모순에 가득찬 전개와 거기 출몰하던 사람들의 기괴한 행장에 대해 알게 되면서 도리어 역사에 대해 더욱 더 알 수 없게, 더욱 더 모르게 되는 기이한 역설을 경험하게 되었다.
둘째는 종로 보신각 바로 곁에 있었던 '아시아제과점'. 소위 젊은 딴따라들, 방송과 연극과 영화와 텔레비전에 종사하는 이들의 한 소굴이었던 그 제과점에 밤낮 틀어박히면서 그 무렵 한 연상(年上)의 여인으로부터 농익은, 그러나 무척 짤막한 한 사랑을 받았던 일이다. 가끔 기억난다. 그것은 순식간의 포옹이었다.
그뒤 그 포옹은 내가 무르익은 한 여인의 육정(肉情)의 세계를 희미하게나마 엿보게 만들었다. 여인들이 사용하는 향수와 육체의 체취가 내 안에 어떤 감각과 어떤 정념을 불러일으키는 것인지에 대해서도 생각하게 하였다.
셋째는 최창봉 선생과의 대화다. 선생은 내가 자기 스무살 무렵의 한 북한 출신 친구와 쏙 빼어닮았다고 하면서 나더러 앞으로 연극을 하지 말라는 충고를 하는 것이었다. 개인 예술가가 되라는 거였다. 나는 그 말 안에 숨겨진 정보를 곧장 알아차렸다. 연극적 재능은 나의 예술적 천품과는 관계가 없다는 거였다. 수많은 세월이 흐른 지금 다시 생각해 봐도 역시 옳은 충고였고 정확한 판단이었다. 그 때문이기는 하지만 나는 지금도 최 선생님을 존경하고 그리워하는 마음을 지니고 있다.
이 세가지 기억을 스무살의 젊음 위에 남기고 그 해 겨울도 갔다.
그해 겨울
4 월혁명의 겨울.
온갖 정파와 단체들, 심지어 경찰들까지도 데모를 감행하는 데모 만능의 한 해, 통일과 혁명에 대한 군중적 정열이 눈부시게 폭발하던 한 해, 군부의 반동이 예감되던 그해 겨울도 갔다.
<'월간중앙'과 동시연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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