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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지하 회고록 '나의 회상, 모로 누운 돌부처' <9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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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지하 회고록 '나의 회상, 모로 누운 돌부처' <98>

농성

'농성'이란 어두운 느낌의 어휘다.

그러나 미술학교의 그 농성은 꽃밭이었다. 수많은 여학생들, 가지각색 옷들로 자기 무늬를 개성적으로 드러내는 여학생들의 군중행동은 그 농성을 꽃밭으로 만들었다. 당시 미술학교는 공업연구소의 우중충한 시멘트 실험실을 강의실로 쓰고 있었다. 우리가 큰 글자의 구호를 써붙인 높은 굴뚝, 또한 지극히 우중충한 '우울의 상징'으로 미술학교의 이미지를 변절시키고 있었다.

'데모'와 '농성' '공업연구소' '시멘트' '굴뚝'들의 검은 이미지들 속에서 은빛으로 또는 비취빛으로, 대개는 양귀비꽃이나 튤립빛으로 반짝이는 것들이 있었다. 우리의 생각과 감각들, 말들, 구호들, 플래카드들! 그것들은 이상한 상상력으로 가득찼고 우리를 억압하는 학생과 직원들과 교수들에게 우리가 배운 미학과 예술적 상상력을 고스란히 하나의 현실로 되돌려줌으로써 큰 당황감을 선물했다. 훗날 파리의 '6.8혁명'의 진행을 보면서 나는 이때의 그 미술학교 데모, 그 새로운 상상력에 가득찬 미학혁명을 떠올리곤 했다.

'상상력이 정권을 잡아라!'
'6.8혁명'의 이 구호는 이미 1960년 초여름 따뜻한 한철 스무살의 내 몸 안에, 생각 안에, 감각 안에 싹트고 있었던 새로운 공책의 내용들 속에 들어있었다.

미술학교 학생들은 너무나 예술적이었고 직원과 교수들은 너무나 관료적이었다. 나는 이때 참된 예술과 아름다움과 상상력의 적은 다름아닌 바로 그 관료주의라는 사실을 처음 알았다. 밤을 새워 토론했으며 그 결론이 압축된 요구조건과 미학적 정치혁명의 새 냄새로 가득찬 기이한 성명서를 이튿날 아침에 발표했고 강의실 벽에 연이어 대자보로 써 붙여 놓았다. 구호를 한 글자 한 글자 써서 큰 굴뚝에 내리닫이로 붙여놓기도 했다.

나는 그 굴뚝 꼭대기에 높이 올라가 구호를 붙이던 그날 새벽을 잊을 수 없다. 푸르른 자개빛 새벽하늘과 우윳빛 첫 구름들의 빛남을 잊을 수 없다. 명확히 알 수는 없었으나 내 생애가 그곳에서 뭔가 달라지고 있음을 뽀오얀 새벽과 함께, 생각이 아니라 감각으로 알아채가고 있었다. 내 안에서 혁명이 일어나고 있었다.

몇몇 상급생들의 멋진 연설과 날랜 행동들, 학장실을 점거하자 교묘한 잔꾀를 부려 도망치는 장발 학장의 자동차 트렁크에 올라타고 이화동 네거리까지 뒤쫓던 한 회화과 선배!

'양승권'이라는 목포 출신의 이 선배는 그 무렵 한 연설에서 '선생이니까 선생이냐, 선생이래야 선생이지'라는 유명한 말을 남겼다. 그는 훗날 프랑스 유학에서 돌아와 나를 만난 술자리에서 그 무렵을 이렇게 회상했다.
"시커먼 연탄 속에 붉은 만월이 떠오르는 계절이었어!"

이미 고인이 된 김정강(金正剛) 선배, 어디에서 무얼 하고 있는지 모를 박완수 선배와 박한진 선배, 프랑스에 살고 있는 방혜자 선배와 김옥녀 선배!

다들 건강 무사하길 빌면서 내 생애에서 전혀 떠날 기미가 보이지 않는 이 작은 데모가 그보다 몇십년전 멕시코의 시케이로스·리베라 등이 벌인 미술학교 데모나 요즘 치아파스에서 마르코스가 주도하는 차파티스타의 사이버 문화적 원주민 농민혁명, 민족혁명 등은 '6.8혁명'과 함께 이제부터 새로이 시작될 이 민족과 전세계의 새로운 문화혁명, 또는 인류의 상고대(上古代)에 대한 대규모 문예부흥의 한 씨앗이었음을 잊지 마시라 당부하고 싶다.

그때 나는 한 사랑을 시작했으니, 사군자 시간에 종이 밑에 까는 담요 조각들로 새벽 추위를 감싸고 상대방의 때묻은 얼굴을 서로 놀려가며 나누던 동지애 속에 몰래 숨겨진 한 사랑을 시작했으니, 그것은 결국 슬픈 짝사랑으로 끝이 났지만 내 의식은 그 실패로 인해 비록 상처투성이이기는 하나 불현듯 어른이 되었음을 기억한다.
'짝사랑과 감옥과 정치적 도피는 사람을 성숙시킨다'는 그 무렵 우리들 사이의 속담이 있다.

그래!
사랑이라고 부르기조차 힘든 그 안타까운 그리움은 그 무렵 내 안에 일어나고 있던 한 혁명에 꽃향기를, 어느날 새벽에 잠시 맡고 나서 잃어버린 매우 우아한 꽃향기를 가져다 주었다. '혁명은 그리움을 매개로 하고, 그리움은 혁명을 빗장으로 한다'는 내 평소의 한 생각은 이때 태어난 것이다.

<'월간중앙'과 동시연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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