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自序> 나의 회상, '모로 누운 돌부처'의 제2부를 열며**
오늘은 단기 4335년, 서기 2002년, 양력으로 6월11일, 음력으로는 5월1일 경술(庚戌). 단오(端午)와 하지(夏至)가 멀지 않은 날이고 월드컵 대회중 한국·미국전이 1대 1 동점(同點)으로 비긴 바로 그 이튿날이다.
이번 제2부부터 회고록이 끝나는 제3부까지 온라인에서는 인터넷 프레시안, 오프라인에서는 '월간중앙' 7월호부터 동시(同時) 연재가 시작된다.
지난 1부를 열 때에도 간략한 머리글을 쓴 것처럼 제2부를 여는 오늘도 또 하나의 제2부 머리글이 필요할 것 같다. 1부 연재를 마치며 가진 '프레시안'과의 인터뷰를 통해 "내 회고록은 실패한 꿈에 대한 기록"이라는 말을 남겼다. 그것과 똑 마찬가지 마음으로 우리가 살아온 김대중(金大中)씨의 민주당(民主黨) 정부(政府) 5년간을 '실패한 꿈의 연대(年代)'라고 표현하고 싶다.
김대중(金大中)씨와 민주당(民主黨)은 명백한 실패작이다. 그 숱한 '게이트' 문제만 가지고도 얘기는 다 끝난 셈이다. 그러나 좀더 확실하게 말한다면 김대중씨와 민주당이 실패한 것이지, 4월혁명으로부터 시작된 우리의 이른바 저 길고 긴 민중민족운동이 실패한 것은 결코 아니다. 그것마저 실패작으로 보려는 태도가 있다면 한마디로 그것은 운동의 내용과 역사를 전혀 모르는 사람의 무식한 태도일 것이다. 바로 그러한 문제점에 관해서 나의 회상이 독자들에게 조금은 도움이 되기를 바란다.
옛 박정희 정권이 녹지보전 하나 잘한 것 빼고는 아무 것도 잘한 것이 없듯 현 김대중(金大中) 정권도 아는 바와 같이 모두 다 그렇고 그렇지만 단 하나 남북(南北)관계의 단추를 풀어내는 데에 온힘을 쏟은 것만은 훗날에도 평가받을 만하다고 다들 그렇게 말한다. 물론 전체적으로 보아 긍정적이지만 세부로 들어갈수록 좀더 깊이 있게 말한다면 나와 나의 벗들, 그리고 민중과 민족이 참으로 마음 깊은 곳에서부터 바라마지 않는 남북 문제의 참된 해결과는 거리가 있다. 그것이 과연 무엇인지 제2부에서 그 단서를 찾아 주었으면 한다. 단지 단서일 뿐이요, 그것도 모색 과정의 단서일 뿐이다. 그런 점에서 또한 제2부 역시 다름아닌 실패한 꿈의 기록일 것이다.
어제, 나는 놀라운 것을 보았다. 퍼부어 내리는 빗줄기 속에 붉은 셔츠를 입고 끝없이 가없이 무섭고 기이한 열기(熱氣)에 떠 춤추고 흔들어대면서 '대∼한민국'을 연호하는 10대, 20대, 30대의 전국적인 물결을 본 것이다.
그리고 또 본 것은, 그 물결로부터 참으로 엄숙한 마음으로 내가 목격한 것은 오늘 이후 이 나라에 자연스럽게 조성된 것이 분명한 어떤 민족문화, 어떤 민족담론에 대해 이제 더는 함부로 폄하하거나 무책임하게 비아냥거릴 수 없게 되었다는 한 역사적 숙명이었다.
물론 지금은 '세계화'의 시대요, '반(反)세계화'까지 그 나름으로 세계화의 한 길이 되는 그러한 거부하지 못할, 명백한 '글로벌리제이션'의 시대다.
그러나 동시에 현대를 지배하는 카오스와 복잡성의 원리는 또 무엇을 우리에게 요구하는가.'중심 없는 중심'을, '작은 것 속의 큰 것'을 요구하고 있지 않은가. 그것이, 우리의 경우에는 무엇인가. 세계에 있어서의 동북아(東北亞), 그 지역 속의 '허브'란 것은 중심인가. 탈중심인가. 주변인가. 아니면 중심 아닌 중심인가.
남북(南北)이 공유(共有)할 수 있는 민족(民族)과 동북아(東北亞)의 전통(傳統)에 뿌리를 두되 당연히 세계적 보편성과 우주의식을 압축한 것, 민족적인 작은 것 속의 전 인류적인 큰 것이 아니던가. 비록 실패는 하였으나 나는 이것들을 추구하여 왔다. 그러기에 감히 '실패한 꿈의 기록'이라는 표현을 쓴 것이다.
나는 결코 자랑거리로 나의 회상을 시작하지 않았고 지속하고 있지도 않으며 끝을 맺지도 않을 것이다. 다만 실패한 꿈의 기록 속에서 다시는 되풀이하지 말아야 할 관성의 유혹과 다시금 다시금 마땅히 되풀이해야 할 창조적인 비약의 가능성을 동시에 발견해 달라는 것이다.
'모로 누운 돌부처'로부터도 배울 것은 진지하게 배우는 것이 곧게 선 참 부처의 길일 터이다.
일산(一山)에서 김지하 모심
***97. 혁명**
젊은 작가 유용주는 그의 '마린을 찾아서'의 후기에서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뒤로 걷기가 앞으로 걷기보다 힘들다. 되돌아보는 일은, 과거를 현재로 옮겨 재구성하는 일은 어려웠다. 나아가는 걸음보다 열배, 스무배, 백배 어려운 일이었다. 그리하여 되돌아볼 일이 많은 사람은 불행하다. 과거가 아무리 아름답다 해도, 그것은 이미 무덤 속에 들어간 숨 끊어진 주검처럼 딱딱하다. 과거는 죽었지만 끊임없이 살아 움직이려 한다. 쉽게 잊지 말라고 거머리처럼 달라붙는다. 어떤 방식이든 반성과 회개 없이는 단 한 발자욱도 못나가게 한다. 더군다나 다시는 떠올리기 싫은 불행한 과거라면 …, 넌덜머리가 난다.
어찌 저 죽은 몸을 위해 무덤을 다시 파헤쳐 숨을 불어넣고 마음을 떠넘기겠느냐. 되돌아보는 일은 죽은 몸을 살리는 만큼이나 공력이 든다. 그래도 살려 볼 것이냐. 숨을 불어넣어 볼 것이냐. 나는 깨끗하게 실패했고, 견딘 만큼 충분히 고통스러웠다. 쉽게 울지 말자. 눈물은 기억을 왜곡하고 분노를 짧은 세월 안에 누그러뜨리는 당의정인지도 모른다. 어찌할 수 없는 상황에 부닥쳐 흘리는 눈물이라도 거듭 태어나는 몸에 양수로 쓰여지지 않으면 안될 것이다. 전 생애를 걸고 노 저어 가는 닿지 못할 섬이 있기에 더욱 그렇다. 자, 추레한 이 몸뚱이를 끌고 어디로 갈까. 겨울 찬바람에 물마루가 다시 출렁인다.'
나는 깨끗하게 실패했다.
어디가 분기점일까.
4 ·19다.
아마도 '4·19세대다'라고 통칭되는 내 세대의 모든 이들이 실패했을지도 모르겠다. '혁명은 하지 못하고 방만 바꾸어 버린 김수영(金洙暎) 세대.' 넌덜머리가 난다. 되돌아보기조차 싫다. 그러나 되돌아보아야만 한다. 그리고 되돌아보는 일은 죽은 몸을 살리는 만큼이나 공력이 든다. 죽기보다 싫은 되돌아보는 일! 겨울 찬바람에 물마루가 다시 출렁인다.
그것은 분명 혁명이었다.
그러나 이상한 혁명이었다.
파고다 공원에서 쓰러뜨린 이승만 동상을 올라타고 앉아 한 할머니가 저주를 퍼붓고 있을 때 이화장으로 하야하는 이승만을 향하여 다른 할머니들이 눈물을 쏟는다. 그토록 못마땅해 했던 대학 교수들이 데모를 하고 반공의 전위인 군인들이 혁명을 엄호했다. 우리 사회와 역사의 특수성이 그대로 드러나는 혁명이었다.
나에게는 은밀한 노트가 한권 있었다. 고등학교 이래의 이른바 철학 노트였는데 술·섹스·마약과 자살을 찬미하는 전면적인 현실부정의 어두운 구절들로 가득찬 것이었다. 나는 그것을 '검은 공책'이라고 불렀는데 별장다방에서 돌아와 가슴 속으로 눈물 흘리던 그날 밤 캄캄한 성북동 뒷산 기슭에서 불에 태워 멀리 떠나보냈다. 내게서 혁명이 시작된 것이다. 그리하여 그날 밤이 나의 실패가 시작되는 분기점이 되는 것이다. 대안이 될 철학을 찾지 못했기 때문이고, 나는 '검은 공책'을 분명 떠나보냈으나 '검은 공책'은 여전히 나를 떠나지 않고 주변을 맴돌았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 실패가 훗날 바로 나에게 '명상과 변혁의 통합'을 꿈꾸는 '요기싸르'의 새 씨앗을 심어준 것이다. 사회는 사회대로, 나는 나대로 이중성과 분열에 시달리기 시작한 것이다.
이 이중성은 세계의 또 하나의 이름이었고, 이 분열은 거기 붙어서 삶을 지속하는 나의 병명(病名)이었다. 그것은 거의 불치(不治)의 질환이었다. 그러나 동시에 나의 철학적 모색의 뼈대이기도 하였다. 분열과 이중성, 이중성과 분열은 학교·강의실·하숙집·찻집·술집과 거리 거리에서 내게 손짓했고, 그 손짓에 따라 나는 이 짓 저 짓을 번갈아 괴로워했으며, 한번 그것이, 그 고통의 감각이 스쳐간 뒤에는 한동안, 떠나지 않고 나를 이른바 '이론구축작업'(金聲翰의 '(五分間'에서)에 잠기게 했다. 그러나 성과는 없었다. 기초적인 고뇌에서 맴돌기만 할 뿐이었다. 그 결과 긴 고뇌는, 그래, 어떤 의미에서는 지금 이 순간까지 계속된다. 수운(水雲) 최제우(崔濟愚)를, 떼이야르'드 샤르댕과 베르그송을, 블로흐와 그레고리 베이트슨을, 데이비드 봄과 들뢰즈.
미셸 셰르를 알게 되고 드디어 주역(周易)과 정역(正易)에까지 입문(入門)한 지금의 나에게도 음양 생극(生克)의 이중성과 불연(不然·아니다, No)과 기연(其然·그렇다, Yes)의 모순은 통합·보완되지 않고, 그저도 분열일 뿐이다. '요기싸르'의 꿈은 아직도 그저 꿈일 뿐, 나는 거리에서, 방구석에서, 잠자리에서 언제나 한 극단에 기울어 화를 내고 짜증을 내는 21세기 한국정신의 한 불행한 어린아이일 뿐이다.
한 극단의 극단에로까지 몰아붙여 생명까지 거부했던 나의 철학 '검은 공책'은 이렇게 해서 일단 파산했다.
'4·19'는 나의 패배!
검은 마귀의 중독에서 벗어난 나는 새로이 배울 수밖에 없었다.
미술학교!
그곳에서의 데모!
장발(張勃) 학장의 축출과 미학과를 문리과대학으로 돌려보내 달라는 등의 이슈를 가진 미술학교의 농성 데모!
그것이 구체적인 분기점이었다.
혁명은 그 직접행동에 가담하지 않은 내게 있어 새로운 '문화혁명', 새로운 '명상-혁명'에의 긴 긴 모색을 시작하는 한 분기점이 되었다. 그 지긋지긋한 시간들을 되돌아보아야 한다. 전생애를 걸고 노저어 가도 닿지 못할 섬이 있기에 더욱 그렇다. 자, 추레한 이 몸뚱이를 끌고 어디로 갈까. 겨울 찬바람에 물마루가 다시 출렁인다.
<'월간중앙'과 동시연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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