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둥 빵즈와 까오리 빵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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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을 추월하자(超越韓國:초월한국).” 중국 중앙정부의 구호가 아니다. 산둥(山東)성 지방정부의 제1구호이다. 축구나 농구 경기의 맨투맨 전략처럼 산둥은 한국을 전담하는 마크맨이다.
참고로 상하이와 선전(深跡)의 구호는 ‘홍콩 추월’이고 푸젠성과 하이난성의 구호는 ‘타이완 추월’이다.
황해를 술상 삼아 한반도와 마주보고 있는 듯한 산둥성은 중국의 27개성(자치구 포함) 가운데서 예나 지금이나 정치경제, 사회문화 모든 방면에서 우리와 제일 밀접한 관계가 있는 성이다. 2001년 말 현재 중국에 진출한 우리 기업수의 70퍼센트 가량이 산둥성 한 군데에 집중되어 있다.
그래서 우리는 감히 무엄(?)하게도 ‘한국을 추월하자’고 외치며 일어선 산둥사람과 그들의 상업경제문화를 중국의 여느 지역보다 우선하여 확실히 파악해두어야만 할 것이다.
중국에는 딱 두 지역의 사람만을 ‘빵즈’(棒子:봉자)라고 부른다. 하나는 ‘산둥 빵즈’, 다른 하나는 ‘까오리(高麗:고려) 빵즈’, 전자는 산둥사람을 후자는 한국사람과 조선족을 가리킨다. 빵즈란 ‘남의 봉이 되는 그런 뜻이 아니라 기골이 장대하고 성격이 솔직하고 화끈한 자를 의미한다. 대개 산둥사람은 이러한 호칭을 자랑스럽게 여긴다.
한국의 화교 가운데 대부분은 산둥출신이고 중국사람 중에서도 한국사람과 정서와 성격이 비슷한 자들은 대개 산둥출신이다. 흔히들 산둥사람의 기질은 위의 빵즈 기질과 더불어 소박하고 선량하고 옛것을 지키고 현실 상황에 안주하며 쉽게 만족하는 사고방식의 소유자로 규정되어왔다.
‘백성은 농업과 양잠을 근본으로 삼아야 한다’, ‘선비는 예의범절을 알아야 한다’, ‘여자는 절개를 지켜야 한다’ 등 유교문화의 덕목을 최고의 규범으로 알고 살아온 주민들로 상공업에는 오히려 장애가 되는 기질의 산둥사람으로 재단되어왔다. 그러나 이것은 그저 막연한 이미지일 뿐이지 정확한 정보는 아니다. 다른 곳도 아니고 우리와 제일 밀접한 지역의 상업경제문화를 그렇게 ‘도매금’으로 치부하고 얼렁뚱땅 넘어가서는 안 될 일이다.
***동쪽은 맑으나 서쪽은 흐림**
“동쪽하늘은 맑으나 서쪽하늘은 비가 내리네.”
중국의 번화한 동부 연해지역과 낙후한 서부 내륙지역 간의 격차를 단적으로 표현하는 구절이다. 현재 산둥의 경제발전과 생활수준은 이웃 연해 지역인 장쑤, 저장, 푸젠, 광둥보다 다소 뒤떨어져 있다.
학자들은 산둥 낙후의 원인을 보수적인 중농억상(重農抑商) 정책, 유교사상의 발상지인데다가 유학의 사회적 역기능, 즉 폐쇄적 관념, 협소한 시야, 수구성이 산둥사람들의 혈맥 속에 오랫동안 뿌리내려왔던 것에서 찾으려 해왔다. 그들은 대개 산둥사람을 수수하나 융통성이 없고, 충실하고 묵직하나 개방성이 부족하고 규범을 잘 지키나 모험정신이 결여되어 있다고 단정지어왔다.
과연 그럴까? 현대 시장경제발전에 별 도움을 줄 수 없는 이러한 척박한 상업경제문화와 ‘경제백치’와도 같은 인력자원으로 정말 산둥은 뭘 믿고 ‘한국을 추월하자’고 외치고 있는 것일까?
그러나 우리는 “동쪽하늘은 맑으나 서쪽하늘은 비가 내리네”가 중국 전체뿐만 아니라 산둥성 내부에서도 그대로 적용된다는 점에 주목해야 할 것이다. 산둥의 서부 내륙은 가난한 편이지만 동부 해안은 윤택한 편이다. 기원전 10세기부터 전한(前漢) 말까지 약 1000년 동안 중국대륙에서 상공업과 경제가 가장 발전하였던 지역은 지금의 산둥 동부 해안지역에 있던 제(齊)나라였다.
산둥은 대략 타이산(泰山)을 중심으로 동쪽에는 제나라가, 서쪽에는 노(魯)나라가 자리잡고 있었다. 이 두 나라의 큰 흐름이 산둥을 송두리째 관류해왔다. 두 나라 국민들은 서로 융합되었지만 상반된 기질과 풍속의 생활습성을 보여 왔다.
제나라는 춘추전국시대 진(秦)과 함께 자웅을 겨루던 2대 강국의 하나였다. 일찍이 상업적인 문화를 바탕으로 중상주의적인 문화를 꽃피웠다. 이에 비해 유교가 발원한 노나라는 줄곧 봉건과 종법질서를 중요시하는 완고한 농경문화가 핵심을 이뤘다. 맹자와 순자의 차이가 그렇다. 노나라 출신인 맹자에게서는 사람의 본성이 근본적으로 착하다는 ‘성선설’이 나왔고 제나라 출신인 순자에게서는 그 반대인 ‘성악설’이 나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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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총각과 제처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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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둥에는 ‘노(魯)총각과 제(齊)처녀’라는 같은 제목의 두 이야기가 전해지고 있다. 하나는 근래 일어난 민간의 우스개이고 다른 하나는 까마득한 옛날이지만 실제 일어났던 역사다.
문화대혁명시대, 산둥 서부지방의 한 총각, 즉 노(魯) 총각이 산둥 동부 즉 제나라 지방의 한 농장에 파견되었다. 노총각은 거기서 옥수수농장을 감시하는 일을 맡았다. 그런데 하루는 그 마을 처녀, 제(齊)처녀가 옥수수를 훔치다가 노총각에게 들켰다. 당시 규정대로라면 제처녀는 노총각의 포승에 묶여 시장바닥에 끌려나와 구경꾼들에게 갖은 창피를 당하게끔 되었다.
‘만인에 당하기보다는 한사람에게 당하는 게 낫다.’ 제처녀는 몸으로 때우려고 작정하고 노총각에게 살살 눈웃음을 치며 콧소리 섞인 말로 교태를 부렸다.
“저는 방년 18세예요.”
“18세나 먹었는데 도둑질을 하다니!”
“아이, 자-긴 참 바보야.”
“바보! 그래, 바보가 너를 체포했다. 어쩔래?”
제처녀는 입을 주뼛거리며 부근의 수수밭을 가리켰다.
“와, 저 수수밭 정말 무성하네요.”
그러나 그 노총각 말하기를,
“저 수수밭도 우리가 관리하는 거야?”
이 이야기는 사람들이 지어낸 헛소리 일 것이다. 하지만 이는 제나라 사람의 기민하고 실용과 이익, 모험과 융통을 추구하는 특징과 대조적으로 노나라 사람의 우직하고 명예와 도덕, 가족과 원칙을 존중하는 특성을 잘 말해주는 우스개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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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음 이야기는 실제 일어난 역사적 사실이다.
제나라 13대 제후 희공(僖公)은 3남 3녀를 두었다. 아들은 후일 14대 양공(襄公)이 된 제아(諸兒)와 규(糾) 그리고 15대 환공(桓公)이 된 소백(小百)이었고, 딸은 문강(文姜), 애강(哀姜), 선강(宣姜)이었다.
맏딸 문강은 이복 오빠와 불륜을 맺었고, 둘째딸 애강은 언니 문강의 아들과 결혼하여 시동생과 놀아났고, 막내인 선강은 위나라 세자에게 시집을 갔는데 첫날밤에 시아버지의 애첩이 되었을 뿐 아니라 후에 전처의 자식과 결혼해 살게 되었으니 이들은 팔자도 기구하다. 과연 훗날 ‘희대의 음녀 3자매’라는 평판을 들을 만했다.
큰아들 제아는 이복 여동생인 문강과 불륜을 맺었고 이를 눈치 챈 희공이 문강을 노(魯)나라 환공에게로 시집을 보냈다. 목적은 양국간의 우호관계를 사돈관계로 묶어 돈독히 하기 위한 것이었다.
문강이 시집간 지 15년 되던 해(기원전 694년), 노 환공은 제 양공 제아의 초청을 받고 경축인사차 제나라를 방문하게 되었다. 노 환공은 시집가서 부모가 죽은 후에나 친정에 갈 수 있었던 노나라의 예법을 깨고 문강을 데리고 제나라로 갔다. 제나라에 가서도 문강은 왕이 된 오빠 양공과 불륜을 계속 저질렀다.
결국 이를 눈치 챈 노 환공이 서둘러 귀국하려고 수레를 탔는데 양공의 명을 받은 팽생(彭生)이란 자가 노 환공을 껴안는 척하고 늑골을 부러뜨려 감쪽같이 죽였다. 그러고는 노나라 사람들에게는 급사병에 걸려 손쓸 사이도 없이 죽었다고 통보했다.
친선관계로 제나라에 갔던 환공이 죽어서 돌아오자 예절과 도덕의 노나라는 제나라에 격렬히 항의했다. 양공은 하는 수 없이 팽생에게 죄목을 뒤집어씌워 죽여버려야 했다. 얼마 지나지 않아 제 양공은 아무 일 없는 듯 문강을 자신의 사촌형과 재혼시키고 성대한 결혼식까지 치렀다. 다시금 노나라 백성들의 공분(公憤)으로 이빨 가는 소리가 노나라 땅에 진동했다. “이 개만도 못한 제나라 나쁜 놈들!”
그런데 흥미 있는 사실은 내륙 노나라에서는 추악하기 이를 데 없는 ‘스캔들’이 바닷가 제나라로 가면 아름다운 ‘로맨스’로 변한 것이었다.
노나라 사람들은 공자, 맹자, 안회 등이 노나라가 나은 대표적 위인이 있었다는 데서 엿볼 수 있듯이 도의를 숭상하고 농업과 학문에 힘써왔다. 반면 제나라 사람은 실리를 추구하고 상업과 관직에 몰두하였다.
그 대표적 인물로는 강태공(姜太公)과 관중(管仲), 자공(子貢)이 있다. 이들 세 명은 하나같이 상인출신이었다. 사마천의 「화식열전」에 등장하는 인물, 즉 오늘의 상공인은 대부분 제나라 출신 아니면 제나라에서 활약하며 큰돈을 벌었던 자들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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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태공은 정육점 주인이었다**
강태공의 원래 직업은 무엇이었을까? 웨이수이(渭水:위수)에서 10년간 3천6백개의 낚싯대를 꺾으며 때를 기다리던 강태공의 생업이 설마 전문 낚시꾼은 아닐 테고. 강태공의 고향 역시산둥반도의 동쪽 바닷가다.
그는 문왕(文王)을 만나기 전 약 30여 년간을 고향 근처의 조가(朝歌)라는 곳에서 소를 잡아 팔고 맹진(孟津)이라는 곳에서 식당을 경영하였던 정육점주인 겸 식당주인이었다.
주문왕과 무왕을 도와 상(은)나라를 멸한 1등공신이 된 후 강태공은 고향 제나라의 초대 제후로 봉해졌다. 30여 년간 장구한 세월을 상업에 종사하였던 그가 제나라를 다스리며 상업 발전을 중시하는 정책을 편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제나라 전역은 중상주의 문화의 특징이 마치 바닷가 갯내음처럼 물씬 풍겨났다.
반면 도덕군자의 표상, 주공(周公)의 아들이 초대 제후로 부임했던 노나라는 경제발전을 정치의 전략적 위치에 놓지 않고 농업만을 중시하는 등 중농억상 정책을 폈다. 노나라와 달리 제나라의 환경은 바다와 면해 있었다. 수산업과 제염업에서 많은 이득을 얻었으며 상업과 수공업을 발전시킬 수 있었다. 강태공은 “상업을 발전시켜 수산업과 제염업의 이익을 더욱 쉽게 취할 수 있도록 한다”라는 내용으로 경제발전의 정책방침을 제정하였다.
제나라의 상업이 급속하게 발달함에 따라 상업사회의 특징을 가진 사회풍속이 출현하게 되었다. 제나라는 노나라가 표방하는 근검절약 정책과는 상반되게 생산을 촉진하는 소비를 장려하였다. 제나라의 사회풍조는 재물과 현실을 중시하는 분위기였으며 이상과 윤리를 경시하였다.
그래서인지 문강과 제양공의 근친상간이나 패륜행위의 악성 스캔들이 로맨스로 대접받을 수도 있었는지도 모르겠다. 제나라는 인정이 부족한 반면 사치를 좋아하였고 모략과 다툼이 잦았다. 제나라는 옛것을 모방하지 않고 시세의 변화에 따라 풍속도 교화되어야 한다는 현실주의 정신을 퍼런 물고기 비늘처럼 선연하게 발전시켜나갔다. 제나라는 현실의 변화에 따라 유효적절한 정책이 결정되고 부국강병을 추구하였다. 서열이나 가문에 관계없이 누구나 재주만 뛰어나면 천거하여 등용했다.
‘사기’의 ‘화식열전’에는 제나라 지역의 풍토는 염분이 많은 불모지이며 백성들이 많지 않으므로 강태공은 여성인력을 육성하고 기술을 발전시키는 동시에 어업과 수산업을 육성시켰다는 내용이 실려 있다. 이러한 방침은 대를 이어 철저히 관철되었다. 제나라의 천연제염업은 열국 중 최고 수준이었고 소금은 멀리 외국에까지 팔려나갔다. 자연히 상업만 전문적으로 하는 시장이 생겨나게 되었고 전문상인과 수공업자도 등장하였다.
제나라의 수도 임치에는 동서남북 사방에 시문(市門)을 설립하고 여기에 ‘시리’(市吏)를 두어 관리하게 하였다. 후세 시장과 시장을 둘러싼 번화가를 의미하는 ‘시’(市)도 이렇게 생겨난 것이다. 도시(都市)라는 단어도 ‘시’ 앞에다가 지방수령의 청사(廳舍)와 그것을 에워싼 관청 가를 뜻하는 ‘도’(都)를 붙여 만들어 진 것이다.
지금 중국의 경제중심은 상하이를 중심으로 하는 장강델타지역이지만 2000년 전 대륙의 경제핵심지역은 산둥 동부 해안이었다. 이곳은 미래의 무한한 잠재력을 뒷받침해주는 과거의 장엄한 상업경제의 전통이 생생하게 살아있는 지역이다. 오늘날 산둥성이 “한국을 추월하자”고 구호를 외치게 된 배경이 그저 한국이 지리적으로 가깝다는 이유만이 아니었음을 알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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