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60년 4월 19일.
나는 그날 새벽기차를 타고 원주에서 서울로 올라왔다. 노상 그러듯이 내 주머니에 여유있는 돈이 들어있었으므로 먼저 광화문에 있는 외국서적 전문점인 범문사로 직행했다.
이 책 저 책 고르다가 책 몇권을 사가지고 외가가 세들어 사는 흑석동 국립묘지 옆의 비게로 갔다. 그날이 바로 성북동 자취방으로 짐을 옮기는 날이었다. 나는 비게 집에서 이불보따리를 들쳐매고 버스를 탔다. 버스가 중앙대학교 입구에 섰을 때 중앙대학교로부터 무수한 학생들이 스크럼을 짜고 신작로로 물결쳐오고 있었다.
이미 여러날 전부터 지방에서 고등학생 시위가 있었으므로 놀라운 일은 아니었다. 그러나 내 마음속에는 두개의 서로 반대되는 견해가 서로 싸우고 있었다. 그 하나는
‘이불 보따리 내팽게치고 지금 내려가서 시위대에 참가하자’
또 다른 하나는
‘이념도 지도로선도 없는 폭발이다. 꾹 참고 내 길을 가자’
둘은 서로 싸웠으나 나는 고집스럽게도 후자를 따라 들뜨는 마음을 견인하였다. 버스가 시청앞에 왔다. 시청앞에는 각 대학의 학생들이 인산인해로 운집해 있었고 시청청사 앞의 단위에는 학생 회장단이 올라가 선동연설을 하고 있었다. 아마도 중앙청을 지나 이승만 대통령의 집무처 경무대(景武坮)로 갈 모양 같았다.
그래.
난 그때 고집스러웠다.
그 어마어마한 군중의 물결에도 휩쓸리지 않고 나는 나의 독자적인 생존의 길을 따라 무거운 이불짐을 메고 택시를 잡아탔다. 택시는 중학동을 지나 한국일보와 안국동으로 나아갔다. 거기서 다시 시위대와 부딪혔다.
시위대는 서울대학생들이었고 미술학교 동료들의 얼굴도 보였다. 나를 알아보고 손짓하는 친구들도 있었다.
나는 택시 안에서 꼼짝않은 채 이불짐만 꽉 틀어잡았다.
‘이념도 지도로선도 없는 폭발이다. 내 길을 가자’
되뇌이고 또 되뇌이었다. 시위대에 막히고 또 막히며 얼마동안을 갔는지 모른다. 동숭동 미술대학 근처까지 가는데 해가 설핏해서까지 차는 거의 기어갔다.
이불짐을 둘러메고 택시에서 내려 그 당시 공업연구소 앞 돌다리 바닥에 털퍼덕 주저앉았다.
동료들이 돌아오고 있었다.
풍삼이의 얼굴이 보였다.
풍삼이 땀을 뻘뻘 흘리며 다가왔다.
‘왜 데모 안하냐?’
‘이념도 지도로선도 없는 폭발이야! 혁명이라고 할 수가 없어’
‘이념은 숨어있고 드러나는 건 행동이지’
‘반동은 생각 안해?’
‘반동이 오면 또 싸워야지’
‘……’
나는 순간 아버지의 얼굴을 보았다. 양잿물을 마시고 헛소리하던 아버지의 얼굴을 본 것이다. 그리고 아버지가 월출산에서 하산했을 때 벌판에 가득찬 가을 코스모스가 하도 눈부시어 주저앉아 한없이 울었다는 그 코스모스 벌판이 보였다. 그리고 티끌바람 몹시 일던 날, 육군 군예대의 쎄트를 실은 트럭위에 올라타고 한없는 절망의 얼굴로 손을 흔들며 멀어져가던 아버지가 보였다. 뚜렷이 보였다.
나는 풍삼에게 대답하는 대신 보따리를 들쳐메고 성북동으로 걷기 시작했다. 혜화동 로터리에서 가두로 진출하려는 동성고등학교 생도들에게 파출소 쪽에서 경관이 총을 쏘았다. 그때 이미 경무대 쪽에서는 발포한 뒤였다.
해가 넘어가고 있었다.
나는 걷고 또 걸었다.
이불짐을 진 것이 아니라 아버지의 얼굴을 지고 걸어가고 있었다.
성북동 산허리 자취방에 도착한 것은 이른 밤이었다.
중간에 구멍가게에서 사온 빵을 씹어먹으며 다시금 원칙을 가늠잡았다.
‘이념도 지도로선도 없는 폭발이다. 나는 내 삶의 길을 간다.’
내내 들뜨고 끓어오르는 가슴의 피를 가라앉히기 위해 책을 펴들었다.
지금도 기억한다.
초저녁부터 읽기 시작해서 한밤 잠들때까지 내리 읽었던 그 책.
월터 페이터의 ‘르네쌍스’였다.
무슨 인연인지 모르겠다.
쉴러의 ‘인간의 미적 교육에 관한 서한’을 최근에 다시 읽으며 프랑스 대혁명의 자연과 도덕 중심의 그 조잡한 변혁을 비판하고 유희와 예술 중심의 인간교양에 입각한 새로운 세계 변혁을 강조한 탁견을 가슴에 새기고 있는 요즘에 그날, 그 4월 19일 밤에 탐미주의라고까지 불리우는 페이터의 ‘르네쌍스’를 읽었던 것은 무슨 인연인지 모르겠다.
그 아름다운 문장과 글 뒤와 글 틈에서 솟아오르는 온갖 형언키 어려운 색채와 형상들, 미묘한 이미지들에 쌓여 내내 중얼거리며,
‘이념도 지도로선도 없는 폭발…’을 중얼거리며 이내 잠이 들었던 그 밤의 독서가 이 글을 쓰고 있는 지금의 나의 새로운 관점, 신념과 무슨 인연인지 모르겠다.
그러나 이튿날 4월 20일.
나는 성북동에서 동숭동 문리대 앞 저 유명한 ‘별장다방’으로 걸어나왔다.
손님도 별로 없었는데 커피를 마시던 내 눈에 창문 밖에서 트럭을 타고, 수없이 많은 트럭을 타고 계속해서 만세를 부르며 종로 쪽으로 달리는 구두닦이, 행상, 그리고 직업을 알 수 없는 청년과 소년들의 고함소리 그리고 손짓들이 들어왔다.
멀리서 총소리도 가끔 들려왔다.
학생들만이 아니었다.
아아, 학생들만이 아니었던 것이다.
시민들이 일어난 것이다.
그렇다.
시민.
‘대중적 민중’이다.
나는 그때부터 마음속으로 울기 시작했다.
잘못 본 것이다.
이념도 지도로선도 없는 것이 아니라, 그것들은 숨어있었고 드러난 것은 행동이었으며 서서이 전민중으로 확산되어 가고있었다.
아버지.
아버지의 슬픈 얼굴, 그 실패한 과거의 기억이 나를 막은 것이었다. 어머니의 슬픈 모습이 나를 막은 것이었다.
이불짐을 내 던지고 풍덩실 데모속에 몸을 던져야 했었다.
나는 마음속으로 울고 또 울면서 성북동 길을 되돌아가기 시작했다.
그러나 간송미술관 앞 큰 돌위에 앉아 다시 생각했다.
‘이불짐을 지고 나의 생존의 길을 끝끝내 걸으리라던 내 고집이 바로 그 숨은 이념과 숨은 지도로선에 관계있다.’
‘아직 나는 나설 때가 아니다. 그러나 참가해야 한다. 조직을 통해서가 아니라 내 온몸의 감각으로 혼자서 천천히 조금씩 참가해야 한다. 내 온몸의 감각! 그것은 문화와 예술을 통해서일 것이다.’
‘아버지, 어머니를 슬프게 해선 안된다. 나는 죽어서는 안된다. 나는 살아야한다. 그리고 냉정한 머리와 뜨거운 가슴으로, 거리를 두고 참가해야 한다. 천천히 조금씩 그 참가를 통해서 새로운 창조적인 길을 찾아나서야 한다.’
그때 다시금 마음속에서 눈물이 쏟아졌다. 만세, 만세를 외치던 구두닦이들, 행상들, 학생과 학생이 아닌 청소년들의 그 외침 소리들! 달리는 트럭들! 태극기의 물결들!
그리고 풍삼의 그 한마디의 끝없는 에코!
‘반동이 오면 또 싸워야지-’
‘반동이 오면 또 싸워야지-’
‘반동이 오면 또 싸워야지-’
내 나이 스무살이었다.
***<알림>**
제1부 '출생'부터 '4.19'까지는 96회로 끝나며
제2부 '4.19'부터 '10.26'까지는 4월부터 연재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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