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학교수가 되려고 지망한 미학과지만 과가 미술대학 안에 있는 한 미술학 쪽에 경사된 컬리큘람일 수밖에 없었던 것일까? 데쌍과 사군자와 미술사 시간이 많은 분량을 차지했던 것이 도리어 내겐 반가웠다.
석고데쌍 시간이었다.
석고데쌍은 해본적이 없어서 섬세한 면작업을 무시하고 굵은 윤곽선부터 챙겨 그리다가 장욱진(張旭鎭) 선생에게 지적당했다.
‘고집은 인정하겠지만 과정은 과정으로써 중요하니까 그대로 따르도록!’
고집.
나에겐 윤곽선에 대한 고집이 있었다. 그 고집이 도리어 내가 아니라 오윤(吳潤)에게서 나타나는 걸 보고 그리도 오윤을 애꼈던 것일까?
그러나 세월이 가면서 장선생이 ‘과정’이라고 불렀던 것이 얼마나 중요한가를 차차차차 깨닫게 되었으니 데쌍 첫시간에 꼭 첫눈에 반해 짝사랑하듯이, 중대한 가르침을 터득한 것이다.
미술대학은 역시 미술대학이었다. 그러나 역시 그럼에도 불구하고 예술가에 있어서 기법수련을 초월하는 ‘고집’은 중요하며 특히 ‘윤곽선’의 고집은 더욱 중요하다. 그것을 확인했으니 역시 대학은 대학이다.
또 있다.
사군자 시간에 란초를 그리다가 혼난 일이다.
란초의 장엽(長葉)을 조심스럽게 공들여 그리라는 김충현(金忠顯) 선생의 가르침을 무시하고 그냥 단번에 ‘쳤다.’ 무엇을 알아서 ‘친’ 것이 아니라, 그저 그래야 될 것 같아서 그랬던 것인데 그 결과가 가관이었다.
그린 게 아니라 쳐진 장엽은 몽둥이나 작대기 같이 되어서 흉물스러웠을 뿐 아니라 김선생에게는 성의가 없다하여 교실 밖으로 쫓겨났다.
쫓겨나서 다시는 그 시간에 들어가질 않아서 학점은 꽝이었으나, 그러나 지금도 생각해보면 그때 나의 직감은 정확한 것이었다.
사군자, 특히 란초는 결코 그려서는 안된다. ‘쳐야’ 한다. 기(氣)의 움직임과 함께 획득하는 마음의 수련체계이기 때문이다. 왼손은 땅을 짚고 하늘인 오른손을 자유롭게하여 몸과 마음의 기운이 붓을 타고 힘껏 종이위에 뻗어나가도록 쳐야하는 것이다.
그때 그런 것을 알리 없었으나 건방진 생각이었지만 왠지 김선생의 사군자 시간이 부질없는 짓거리로 비쳤던 것이니 내 생애를 통해서 본다면 중요한 한 매듭이기도 했던 것이다. 사군자 수묵(水墨)이나 데쌍이나 모두 자기 고유의 독자성을 가지면서도 채색화의 밑그림 노릇을 한다는 걸 생각하면 대학 1학년에서 이미 나는 낙제점을 받은 것인데, 그럼에도, 그 낙제점의 기법적인 의미를 인정함에도 란초는 결코 그려서는 안됨을 몸으로 실천했으니 내겐 참으로 의미있는 사건이었다고 생각되는 것이다.
이럴때 쓰는 관용어는 안다.
견강부회(牽强附會), 그리고 아전인수(我田引水)… 맞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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