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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지하 회고록 '나의 회상, 모로 누운 돌부처' <9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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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지하 회고록 '나의 회상, 모로 누운 돌부처' <91>

시험날

그날,
비가 내리고 있었다.
대학입학 시험을 치르는 이화동 미술대학 강의실은 어두운 편이었다.

수학이 제일 큰 문제였다.
그러나 나는 아예 방정식 등은 일찌감치 포기하고 그 대신에 조합(組合 : 컴비네이션)이나 수열(數列) 따위를 달달 외우고 있었는데 조합 문제가 여럿 나와서 다행히 과락은 면하게 되었다. 다른 과목은 걱정할 것이 전혀 없었다.

그 여자가 앞자리에 앉아 시험을 치르고 있었다. 카키색 코트. 키작은 여자.

시험은 끝났다.
원남동 고궁옆 길을 걷고 있었다.
비가 그쳤다.

그 여자가 앞에서 걸어가고 있었다. 카키색 코트. 카키색 모자. 키작은 여자. 우산을 흔들며 두 여자친구와 웃으며, 장난질을 치며 앞에서 걷고 있었다.
나는 뒤따라 가며 그 여자의 뒷모습을 내내 지켜보았다.

운명이 나에게 손짓했다.
이 여자가 네 여자라고.
가슴이 뜨거워왔고 숨쉬기가 힘들었다.
그랬다.
나는 그때부터 그 여자를 사랑하기 시작한 것이다.

그 여자는 안국동에서 골목으로 사라졌다.
나는 중앙청을 지나 적선동도 지나 필운동까지 가야한다.
그런데 안국동 로타리에서 잠시 멈춰선 나는 희귀한 감정에 사로잡혔다.

일종의 해방감이었다.
그 여자의 존재로부터, 그 여자에 대한 관심의 압력으로부터 벗어나 조금은 허전하지만 그러나 자유롭다는 느낌이었다.

왠 일일까?
필운동쪽으로 걸으며 내내 생각했다.
이 여자가 누구인가?
왜 이 여자는 내게 들어온 것일까?
그리 밝은 예감도 아닌데…
그리고 왠 해방감일까?

그렇다.
그리 밝은 예감이 아닌데 분명 내 삶 안에 뛰어든 그 여자 ‘에밀리’를 처음 본 그날, 첫눈에 그냥 반해버리고 만 것이다.

입학한 뒤 우리가 그해 가을에 연습하다 결국 펑크를 내고 만 번역극 ‘돌아온 아버지’에서 그 여자가 맡은 역할이 에밀리였는데, 우리는 그때 흔히 영어나 유럽어로 말하고 부르는 것을 좋아했으므로 노상 ‘에밀리’라 불렀던 것이다.

에밀리.
내 첫사랑.
그러나 고백도 못해본 채 내내 짝사랑으로 끝났고 졸업 후 미국 유학한 그 여자는 거기서 백인과 결혼해버렸다.

에밀리가 한때 밤의 원남동 길을 걸으며 내게 한 말이 있다.
‘이 나라는 글러먹었어.
나는 거지가 되더라도 구라파로 가서 살겠어.’

구라파는 아니지만 미국으로, 호주로 가서 살고있는 그 여자의 운명 역시 에밀리였다. 번역극이라는 말이다.

나는 그 말을 들은 뒤부터 그 여자에 대한 나의 뜨거운 마음이 조금씩 식어가기 시작했고 미국 유학중 잠깐 들렀을 때 한국과 한국 문화에 대한 극히 모멸적인 발언과 서양 문화에 대한 거의 맹목적인 추종 발언을 듣고나서 비로소 완전히 그 불행한 짝사랑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

그러나 나의 대학시절 내내 나를 열병으로 들끓게 했던 에밀리에 대한 내 사랑, 그 안타까운 짝사랑이 있었기에 그나마 나의 20대가 그리 쓸쓸하지는 않았던 거라고 자위한다.

왜 그러는가?
진정한 사랑은 오직 짝사랑뿐 일수도 있지 않은가! 허허허허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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