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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지하 회고록 '나의 회상, 모로 누운 돌부처' <8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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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지하 회고록 '나의 회상, 모로 누운 돌부처' <89>

삼총사

문예반에 고2 때부터 참가한 내게 단짝 친구 둘이 있었다. 아마 그 두 사람이 없었다면 나는 문학의 길을 포기했을런지도 모른다. 그만큼 셋은 가까웠고 상호 영향을 주고 받았다.

지금은 떠나고 없는 고 이래수(李來秀)형의 혼백에는 안녕의 기도를, 그리고 소식을 알 길없는 뱍약길(朴若吉) 형에게는 건강의 기도를 올리며 그 기쁜 우정의 날들을 기억하고자 한다.

우리 셋이 하도 붙어다니니까 주변에서 ‘삼총사’라고 불러주었다. 우리 셋은 서로 반은 달랐으나 틈만나면 만났고 학교는 물론이고 하숙집, 하숙 근처의 중국집, 우동집, 빵집, 술집에서 맨날 어울렸다.

‘다만 아비는 너에게 인고(忍苦)하라는 한마디를 할 뿐이다. 부디 인고하라! 인고하라! 인고하라! 하하하’
이래수형이 충청도의 부친으로부터 온 편지 마지막을 되뇌이는 소리다.
‘생활비를 줄여 보낸다는 소리야, 하하하’

이형은 통이 크면서도 섬세하고 공부를 잘하면서도 문학의 독서량이 우리 셋 가운데에 가장 많았다.

한번은 중국집에서 배갈 몇잔에 취해서 큰 소리로 부르짖었다.
‘손창섭은 끝났어!
그런 절망은 이제 끝이야!
새 시대가 오고 있어, 새 시대!
우리가 바로 그 새 시대야! 하하하’

지금 생각하면 물론 자만심이다. 그리고 문학하는 사람은 대개 이런 정도의 자만과 오기는 늘 있다. 그러나 그 무렵엔 표현만 애매하고 서로 달랐을 뿐 여러사람이 새날의 도래를, 희망의 새 사회, 새 세대가 오리라는 경륜을 간혹 드러내곤 했는데 다만 그것이 구체적으로 어떤 사회이며 어떤 사상과 이념이 이끄는 사회라는 생각이나 얘기는 못하고 있었다.

6.25 전쟁이후였기에 더욱 그랬다. 그저 미국식 민주주의와 자유의 사회 정도로 그리는게 지식인들의 대체였으나 일반 민중이 그리는 것이 과연 미국식 민주주의와 자유였다고는 생각되지 않는다.

좌우간 이래수형은 그 밖에도 실존주의의 종말과 유럽정신의 쇠퇴를 예언했고 동양사상에 배경을 둔 새로운 사회사상이 도래하리라는 말까지 서슴없이 할 정도였다. 지금 생각하면 그 아득한 40여년 전에 그가 이렇게 내다본 것이 그저 놀랍기만 할 뿐이다. 그가 제일 좋아한 작가는 임어당(林漁堂)이었다. 아마도 임어당의 그 어디에도 얽메임 없는 무애(无碍)와 큰 자부심을 닮고 싶었던 것같다.

박형은 이무영(李無影) 선생과 농촌 소설에 깊이 침잠해 있었다. 그의 어휘 하나하나, 그의 관념 하나하나가 무엇이든 이무영 스타일의 농촌소설과 관계없는 것이 없고 점차 쇠락해가는 농촌생활에 잇닿지 않은 것이 없었다.

박형은 서울에 자기 집이 있었기에 나와 이형이 자주 신세를 지기도 했고 또 이런 폐를 도리어 기쁘게 맞이하는 선량하고 씩씩한, 그래, 전통적인 농민같은 사람이었다. 그는 농촌을 괄시하면 우리 사회는 무너지고 만다는 확신을 가진 사람이었다. 그것이 좀 지나쳐서 도시적인 유행 전체를 아주 못마땅해 하는 거의 편벽될 정도의 태도마저 갖고 있었다.

셋은 문학과 새로운 삶에 관해 주로 이야기하였고, 항용 다 큰 어른들처럼 서정주 등의 낡은 문학과 현대 서구 문학 등에 대해 함께 비판하는 결정적인 판단을 내리고는 그것을 중심으로 토론도 하고 논쟁도 하고 그랬었다. 많은 경우 이형이 주도를 했고 비용도 이형이 감당하곤 했다.

그런 날들 가운데 하루밤, 영영 잊히지 않는 밤이 있었다.
셋이 함께 술한잔 먹고 동대문 창신동에 있는 사창가에 가서 함께 이른바 총각 딱지를 뗀 밤이다. 나의 첫 여자는, 끝나고 보니 곰보요 애꾸였다. 곰보요 애꾸인 창녀가 내 첫 여자였다는 것은 사실 내 인생에 어떤 깊은 뜻을 갖는 것 같다.

시커먼 거울위에 얽어맨 판잣집 사창에서 잠시 성행위를 하고 헤어지던 그 여자가 미소띈 얼굴로 악수를 청하며 이름을 물었을 때 대답하는 나는 분명 떨고 있었다.

‘김영일’

나, 즉 ‘김영일 현상’에 대한 회상에서 이 부분은 나의 무겁고 침침하고 점착질적인 어떤 한 사상의 탄생에 구체적인 시발점이 되지 않았나 생각한다. ‘나의 회상’이 결국 ‘모로 눕는’ 까닭과도 깊은 연관이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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