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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지하 회고록 '나의 회상, 모로 누운 돌부처' <8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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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지하 회고록 '나의 회상, 모로 누운 돌부처' <88>

연애편지

나는 청소년기에 연애같은 연애를 제대로 해본적이 없다. 여자에 대해 아는 게 없었다. 막연한 연애감정과 낭만적이고 몽환적인 생각만 하고 있었다. 그러는 내게 연애편지를 대필해 달라는 친구들의 부탁은 왜 그리 끊이질 않았던지!

밤하늘의 별이 어떻고 비오는 날에는 어떻고 숲속의 푸른 나무와 새들의 지저귀는 소리는 어떻고 따위 그저 상투적인 편지를 내내 써주다가 지겨우면
‘내 편지 보면 여학생들이 되려 도망갈거다!’
이리 겁주기도 하는데 우스운 것은 그때마다 돌아오는 대답이었다.
‘임마! 빼지마! 전번에 학수 써준 편지도 여학생이 홀딱해가지고 연애에 골인하게 됐어 임마! 잔소리말고 빨리 써줘!’

하하하
이런걸 두고 속담에서는 뭐라고 하던가?
여학생들. 숙명이나 풍문, 덕성 아이들이 모두 그 모양이라면 연애 따위 해봐야 맨날 상투적인 감정유희밖에 더하겠는가?

이리 한편으로 자기위안 비슷한 생각도 안해본 것은 아니다. 그러나 여전히 내심엔 여자에 대한, 연애에 대한 동경과 갈증이 사라지지 않았고, 사라지기는커녕 날이 갈수록 치열해지고 있었다. 그리고 그것은 저 상투적인 숱한 연애편지와는 다른 어떤 것이었다.
그것은 그럼 쎅스였을까?

***수음(手淫)**

나는 청소년기에 오래도록 수음의 악습을 버리지 못하고 있었다. 원주의 극장에서 한밤중 그 지독한 포르노를 본 뒤부터 생긴 악습이었다. 요즘에야 수음도 적절하기만 하면 필요하기까지 한 성행위라고 인정해줄 만큼 사회적 성의식이 발전했지만 그 무렵의 일반적 성의식에서 수음이라면 컴컴하고 음침한 악마적 행위 이외에 아무것도 아니었다. 그 악마적이고, 색마적인 행위를 다른 사람 아닌 바로 내가 하고 있었고 그것도 습관이 돼 있었다.

혼자 있을 때나 화장실에 갔을 때 영화배우들이나 벗은 여자의 몸을 생각하면 피가 거꾸로 흐르며 이성을 잃곤 했다. 그리고는 짧은 황홀 뒤엔 칼날 같은 죄의식과 가책이 가슴을 에이는 듯 해 괴로워하곤 했다.

이제와선 참 아득한 옛이야기 같지만, 그리고 훗날 연극이나 학생운동 등을 하면서 굉장히 외향적이고 밝아지게 되었지만, 그 무렵의 나, 나의 의식 내면은 어둡고 음산하고 죄의식과 콤플렉스로 가득찬 침묵 그것이었다. 아주 가까운 친구 이외엔 말을 잘 건네지도 못했고 대답도 제대로 하질 못하는 주변머리 없는 사람이었다.

성격이 음침하면 몽상적으로 되는 법이다. 나는 밤마다 엉뚱하기 짝이없는 파격적인 삶의 양식이나 담론을 메모하면서 우울한 몽상가가 되어갔다. 그 무렵의 시들, 다 기억 못하지만 주제만 떠올린다면,

‘눈쌓인 밤의 교회 뜨락에 붉은 뱀이 알을 까는데 그 알 속에서 종소리가 울려나온다.’ ‘답싸리가 푸르게 둘러싼 눈동자 속에서 불타는 바다가 하늘로 오른다.’ ‘뻐스 속에서 칼들이 난무하며 회색 시체들이 의자 밑에서 벌떡벌떡 일어선다.’ 등등.

‘슈르’적이었다는 얘기다.
이 모든 초현실적인 어두운 환각들이 수음으로 인해 침침해진 의식 저 편으로부터 인광처럼 배어나오는 귀신불들은 아니었는지? 퍼렇고 축축한 그 부평 골목의 귀신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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