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버지는 내가 문학에 관심을 갖는 것에 대해 한때 물으셨다. 내가 일반 공부를 열심히 한다는 전제 밑에서 글쓰기를 하고 있는 점을 확인하시고는 안심을 하셨고, 한걸음 더 나가 내게 보다 본격적인 문학 수업을 권장하셨으며 아버지의 목포 옛 친구로서 그 무렵 조선일보 문화부에 재직 중이던 문학평론가 최일수(崔一秀) 선생을 찾아가 지도를 받도록 손을 써주셨다.
조선일보사 문화부에 갔던 일이 생각난다.
활자와 원고지, 삐걱거리는 의자들, 바삐 움직이는 사람들, 전화벨소리, 그 북새통속에서도 의자를 갖다 나를 앉혀놓고 최선생님은 마치 신문기자가 기사처리 하듯이 문학을 강의하셨다.
‘영일이는 문학을 선비들이나, 한가한 사람들이 하는 것쯤으로 생각하고 있지? 말도 느릿느릿하게 하고 술이나 한잔 기울이며 음풍농월하는 것. 우리나라 시인 중에도 그런 사람 많지. 서정주 읽었나? 읽었어? 그런 사람들이지. 그러나 현대의 문학이란 바쁜 현대 생활 속에서 삶과 세계의 본질과 상황에 대해 보다 근본적인 질문을 던지고 그 상황을 표현하며 그 상황을 극복하려는 의지를 표현하는 거야!
모더니슴이란 말 들어봤지? 현대문학을 할려면 모더니슴 공부부터 해야돼.’
최선생님은 엘리엍, 스펜더, 오든, 루이스, 멕니스 등에 관해 얘기하며 C. D. 루이스의 한글판 이론서 두 권을 주셨다.
나는 그 뒤로도 여러번 최선생님을 뵈었고 또 선생님 소개로 시인 장호(章湖) 선생에게 나의 난해하기 짝이없는 시 한편을 보여드리기까지 하였다. 그러나 내가 멕니스에게서 모더니슴이 무엇인가를 알아태고 김성모 선생님으로부터 오든이나 스펜더, 엘리엍의 원전시집을 빌려다 읽는 공부를 통해 내가 얻은 잡다한 문학지식 보다는 어느날 범문사에서 내 스스로 구입한 딜런 토마스(Dylan Thomas)의 시선집 한권에 깊숙이 매료되어 이론 이전의 강렬한 이미지네이션과 겔트적인 생명의 찬란한 색채들에 휩싸인 것이 훨씬 더 그 무렵의 나를 잘 설명할 수 있을 것이다.
그렇다.
그 무렵, 그리고 4.19이전 대학 1학년 때까지의 내게 있어 딜런 토마스는 거의 신적인 존재였다. 그렇다고 숭배하는 따위는 전혀 아니고 많이 배웠다는 뜻이겠다. 토마스의 형태시들을 흉내내었고, 시어들이 색채로 가득찼으며 초현실주의적, 묵시록적 환영으로 나의 시는 붐볐다. 그러나 어떨까?
솔직히 말해서 그것이 조금은 고급한 현실도피는 아니었을까? 왜냐하면 고3과 대학 1학년 무렵 틈만 나면 끄적이다가 4.19 직후 불에 쳐넣은 메모첩 중에 가당치도 않게 현실을 뛰어넘는 의식의 여러 기제나 몽환, 그리고 마약의 효과와 쎅스에 의한 망아(忘我)나 황홀에 대해 거듭거듭 강조하고 있었으니까. 기법상의 문제 이외에는 모더니슴은 고3때의 나의 시 작업에서 이미 무너져버렸고 딜란과 프랑스 초현실주의, 그리고 서정주의 초기 생명파 시대가 내 나름의 생명찬가로, 아니 생명 초월의 황홀찬양으로 마치 마약처럼 내 정신 전체에 범람하고 있었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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