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인화면으로
김지하 회고록 '나의 회상, 모로 누운 돌부처' <82>
  • 페이스북 공유하기
  • 트위터 공유하기
  • 카카오스토리 공유하기
  • 밴드 공유하기
  • 인쇄하기
  • 본문 글씨 크게
  • 본문 글씨 작게
정기후원

김지하 회고록 '나의 회상, 모로 누운 돌부처' <82>

빨치산

이 사건의 기억은 또 하나의 사건을 바로 잇달아 기억나게 한다.
어느 날 학교로 한 아주머니가 찾아왔다. 날더러 대뜸 목포의 로선생을 아느냐고 묻는다. 안다고 했더니 그 분이 지금 중앙청 앞 중학동에 계시는데 날 보고 싶어 하니 지금 곧 가자는 것이었다.

놀라운 일이었다.
도대체 언제적 로선생인가?
내가 국민학교도 들어가기 이전의 그 한 시절에 만나뵈었던 분이 아닌가!

그 뒤, 그 그림자 둘이 벽에 어룽이던 그 밤뒤로는 풍문으로만 들어오던 로선생, 유명한 공산주의자요 목포시당의 당성심사위원장이며 월출산에 이어 지리산, 태백산에서 일본도의 사나이로 날리던 저 유명한 빨치산 로선생이 아닌가! 그런데 그분이 어떻게, 지금 여기 서울에서 나를 찾는다는 것인가? 꿈결같은 이야기였다.

좌우간 나는 귀신에 사로잡혀 산으로 끌려가듯이 그렇게 그 아주머니를 따라 중학동 길가의 한 거대한 한옥집으로 가 안내되어 들어갔다.

그 집 문패에 ‘정병조’라고 돼있는 것으로 모아 목포갑부 그 사람 집임을 대뜸 알 수 있었다.

한귀퉁이의 작은 방이었다.
손바닥만큼 비좁은 캄캄한 방안 저 안쪽에 두개의 눈이 번뜩이고 있었다.

‘영일아!’
내 손을 덥석 잡았다.
‘영일아! 많이 컸구나!’
차차 얼굴에 바깥 빛이 비쳐들어 모습을 알아볼 수 있게 되었다.
수척!
그랬다. 수척했다. 봉두난발에 수척할대로 수척했는데 두 눈만이 번뜩이며 살아 불타고 있었다. 로선생이었다.

부모님 소식을 묻는 것 이외엔 별로 말이 없었다. 계속 내 얼굴만 바라보고 있었을 뿐이다. 그리고선 이윽고 나는 돌아왔다.

그 뒤로 가끔 선생을 만나 뵈었다. 뵈올 때마다 조금씩 주워들은 단편적인 이야기들을 꿰맞추어 내 나름으로 사연을 짐작했다.

월출산에서 지리산, 태백산으로 옮겨갔다. 태백산에서 전투 중 사로잡혔다. 경찰에서 사형을 집행하려 했다. 아마도 마지막 부탁으로 친분이 있던 정병조씨에게 연락이 됐다. 정병조씨가 보증을 서서 풀려났었던 것 같다.

그 뒤 로선생은 건강을 회복하자 퇴계로에 자그마한 기계수리공장을 운영하였다. 나는 가끔 뵈오러 갈때마다 쥐어주는 용돈을 받아 주로 책을 사서 보았다.

사상적 영향관계?
조직?
어림 반푼어치도 없는 소리다.

그렇게 생각 없는 나도 아니거니와 그렇게 소박한 선생도 아니었으니 그저 공부와 건강만 걱정할 뿐이었고 다시금 살아보겠다고 노력했던 것뿐이다. 그러다 어쩌다 길이 끊겼고 선생은 이내 내 의식에서 멀리 사라졌다.

훗날훗날 내가 대학을 마칠 무렵에 살던 미아리 골목에서 한 밤중에 갑자기 부딪쳐 결혼을 하셨고 아이들도 있다는 소식을, 그리고는 오년 전 아버님 돌아가셨을 때 분향하러 오신 걸 잠시 뵈었을 뿐이다.

잠시 뵈었을 뿐이었지만 여위고 날카롭고 날랜 몸짓으로 보아 로선생은 ‘영원한 빨치산’이라는 움직일 수 없는 확고한 인상을 받았다.

그런 사람이 있다.
자기의 신념하나가 삶 전체를 관통하는 사람. 그 삶의 터전이 산이든 들이든, 높은 누각이든 낮은 거적자리이든 불문하고 변치않는 그런 사람.

로선생은 바로 그런 사람이었다.

이 기사의 구독료를 내고 싶습니다.

+1,000 원 추가
+10,000 원 추가
-1,000 원 추가
-10,000 원 추가
매번 결제가 번거롭다면 CMS 정기후원하기
10,000
결제하기
일부 인터넷 환경에서는 결제가 원활히 진행되지 않을 수 있습니다.
kb국민은행343601-04-082252 [예금주 프레시안협동조합(후원금)]으로 계좌이체도 가능합니다.
프레시안에 제보하기제보하기
프레시안에 CMS 정기후원하기정기후원하기

전체댓글 0

등록
  • 최신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