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밖에도 몇 군데의 하숙집들이 떠오른다.
서대문에 있을 때다.
학교에서 돌아와 석양 무렵이 되면 저녁을 일찍 먹고 폭격에서 살아남은 옛 주택가의 오래된 골목을 천천히 거닐며 붉은 벽돌집에 기어오르는 푸른 덩굴나무의 기이한 빛깔을 보고 그 집들로부터 울려나오는 해맑은 피아노 소리를 들으며 쎈티멘탈리슴에 젖어들던 것이 생각난다.
이른바 소년기의 낭만이겠는데 학교의 독일어 시간에 배우던 ‘임면제’라는 소설이나 영어시간에 배우던 영국 낭만파 시인들의 서정시 또는 음악시간에 배운 ‘트로이멜라이’류의 묵상적인 음악들에 연계된 ‘동경’이었다고 기억된다.
그러나 지금 생각해도 그렇다.
그 동경에는 현실적인 근거가 없어서 아무리 치열하게 동경하더라도 현실적인 발상을 촉발시키지는 못한다는 것이다. 도리어 사유와 정서가 공허해지고 어떤 계기에는 고답적이거나 그로테스크로 떨어져 위태로운 선민의식을 갖게 될 수 있다는 점을 막연하지만 그때 이미 느끼기 시작한 것도 기억난다.
재동에 하숙할 때의 기억도 난다.
한 방에 웬 중년 어른이 함께 하숙을 함께 했는데 그 분은 학원을 경영하는 분으로 밥을 몹시 급히 먹고 성미가 매우 급한 분이었던 것이 생각난다.
그 재동집 외동딸이 숙명여대 국문과를 다니는데 내가 문학에 취미가 있다는 것을 알고 간혹 문을 열고 형편을 묻기도 하고 맛있는 반찬을 해주곤 하던 것도 잊히지 않는다.
재동 집에 있을 때,
그러니까 고2 때였던가.
제가 무얼 안다고 글쎄, 하숙비를 절약해서 모으고 모은 돈을 한꺼번에 투자하여 미국의 모던라이브러리 판의 맑스의 ‘자본론’ 2권을 광화문 범문사에서 사들인 적이 있다. 솔직히 말해서 지적인 사치였다. 왜냐하면 경제학적 지식의 기초가 전혀 없고 맑스의 학문에 대한 입문과정이 전혀 없었던 내게 있어 ‘자본론’이란 것은 아버지의 그 한 시절에 대한 추억과 이리 저리 뒤적이며 ‘내가 드디어 자본론을 가까이 한다’는 일종의 오만을 만족시키기 위한 허영심에 지나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 밖에도 소련 번역성에서 나온 영문판 막심 고르키의 ‘어머니’, 도스토엪스키의 ‘가난한 사람들’과 ‘까라마조프家의 형제들’을 샀는데 ‘어머니’와 ‘가난한 사람들’은 사전 열심히 찾아가면서 겨우 읽었으나 ‘까라마조프’는 내내 읽지 못하고 나중에 대학 때 한글판으로 읽었다.
이 일이 학원 경영하는 그 어른을 통해 주인집 따님에게 알려져 하루는 그 따님이 나를 안국동의 한 과자점으로 데려가 참으로 따뜻하고 친절한 우정과 깊은 관심으로 감싸주어 내 생애엔 별로 흔치않은 호사를 한 적이 있었다.
그러나 그 사건은 좋은 일만을 가져다준 것은 아니었다.
그 무렵 어느 날이다. 학교로 종로 경찰서 정보과 형사가 찾아와 나를 종로서로 데리고 가는 일이 생겼다. 교무실의 나를 아끼는 선생님들의 놀람은 말할 수 없이 컸고 나는 까닭을 알 수 없는 어리둥절 속에서 희미하게나마 그 이유를 짚어낼 듯 했는데 드디어 종로서의 형사가 그것을 알려주었다.
자본론이었다. 그 책을 사면서 책방주인에게 이름과 신상명세서를 적어서 아무 의심없이 건네준 일이 있었는데 그 명세가 종로서로 보고되었다가, 어느 고등학생이 관련된 적색 삐라 살포사건이 일어나자 보고서에 있는대로 나를 수배하게 된 것이었다.
나는 사건과 무관하며 다만 지적 호기심에서 책을 샀으나 읽지는 못했다고 대답했다. 그러나 나를 방면시켜준 것은 내 대답이 아니었고 이인순 선생님을 비롯한 몇 분 가까운 선생님들의 연대보증에 의해서였다.
그 사건은 선생님들이 나를 엉뚱한 친구로서보다 공부하고 고민하고 사색하는 한 지적인 청년으로 높이 봐주게 만들었다. 매번 그런 표정과 언질에 부딪힐 때마다 당황하고 죄송할 뿐이었다. 그때 ‘자본론’은 종로서에서 압수해가지 않고 내 수중에 있다가 대학 때 상과대학에 다니는 한 친구에게 넘어갔고 내가 막상 자본론을 실제로 읽은 것은 훗날 학생운동하는 친구에게 빌린 전석담 번역의 한글판 2권으로다.
허영심!
이 사건은 내게 말할 수 없이 창피한, 내가 나 자신을 비난하고 평가절하하는 계기가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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