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공부를 제대로 하기 시작한 것은 2학년 때부터다.
코피를 흘리며 잠을 쫓으려고 허벅지를 쥐어뜯는 세월이 얼마만큼 지나자 공부에도 길이 열리고 습관이 붙고 재미가 나기 시작했다.
그러나 다른 과목은 다 높은 성적이고 기하까지도 우수했으나 대수만큼은 겨우 빵점을 면하는 정도였다. 취미가 없으니 그 시간엔 졸거나 대수책 여백에 낙서를 하기도 했다. 대수선생에게 이 낙서가 들켰다.
‘늬가 변소 낙서 다 했지!’
머리를 때리며 이렇게 몰아붙이는데는 정나미가 뚝뚝 떨어졌다. 정 떨어지니 성적이 나쁘고 성적이 나쁘니 정이 더 떨어지고 그랬다. 대수와 함께 또 한가지 취미 없는 게 있었으니 체육시간이었다. 군인출신의 체육선생에게 이상하게 잘못 보여 내내 미움을 받았던 것이 기억난다.
그러나 그 밖엔 모두 잘했고 취미가 있었다. 역사 지리와 국어나 외국어 등이 특히 좋았다. 성적이 올라가며 반을 이동하여 최고반까지 옮겨갔다. 그 무렵 중동학교는 성적순으로 반을 나눴으니 한 학년을 상중하 세반으로 갈라놓아 성적에 따라 이동하게 되어 있었다.
나는 맨 밑엣반에서 중간, 그리고 맨 위엣반까지 옮겨가며 골고루 친구들을 사귄 셈이었다. 그래서 의외로 내게는 주먹친구들이 많았다.
***생활**
한때는 화동(花洞) 경기고등학교 밑에서 방을 얻어 자취도 했다. 한 학년 위의 원주선배 김성식 형과 자취를 했으나 몇 달째 되는 때 지독한 감기에 걸려 몹시 고생한 뒤 집에 사정을 얘기해서 하숙으로 옮겼다.
감기 걸렸을 때 생각이 난다.
중동학교 안국동 쪽 입구에 우동집이 하나 있는데 그날 우동 한그릇에 고춧가루를 잔뜩 부어 혀가 타도록 맵게 먹고나서 비틀거리며 화동집까지 어떻게 갔는지 모르겠다.
가는 길에 풍문여고와 덕성여고가 있는데 기억나는 것은 비틀거리는 나를 손가락질하며 깔깔거리던 두 여학교 여학생들의 소란스런 놀림뿐이다. 무엇인가 내 젊음이 한없이 초라해지는 느낌이었다.
이 느낌.
허수아비처럼 한없이 가볍고 초췌한 느낌.
나는 그때 이 느낌을 견딜 수가 없었다.
자취를 걷어치우고 하숙으로 옮길 때의 그 날 것 같고 살 것 같던 마음도 이제 생각난다. 나는 하숙을 여러군데 옮겨다녔다. 그러나 고3때 필운동 배화여고 아랫켠 하숙집 가운데 방에 제일 오래 있었던 것 같다.
그 집.
자그마한 기역자 한옥에 자그마한 마당이 있는 옴팡한 집.
그 집에서 나는 많은 책을 읽고 많은 글을 썼으나 그보다 더 많은 공부를 했고 그보다 훨씬 더 많은 초현실적인 꿈을 꾸었다.
나에게, 계속 생성 중에서 변하고 있는 유체상태의 그 무렵의 나에게 그 집은 그 변화를 가둠이나 멈춤이 아니라 산채로, 흐르는 채로 담을 수 있었던 아담한 골동품 그릇이었고 고마운 나의 객지속의 둥지였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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