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일장의 경우와 마찬가지로 나는 고3때까지 한 해에 한 차례씩, 세 번을 7대 사립고등학교 문학의 밤에 참가하여 시낭독을 했었다.
세가지 장면이 떠오른다.
하나는 덕수궁 근처의 폭격으로 무너진 한 건물터를 지나 내가 낙방한 배재 학교의 그 오래된 미국식 교실에서 행사 준비에 관한 회합을 하던 일이다. 그 때 중앙학교 대표로 나왔던 최청림(崔靑林)이라는 미소년의 모습을 잊을 수 없다.
지금 조선일보에서 일하는 그 최청림씨는 회합이 끝나고 먹을 줄 모르는 배갈을 몇 잔 먹고 정신이 나가 뿌우연 호박꽃 같은 중국집 방 전등아래 동료들의 얼굴이 탈바가지처럼 흔들리며 명멸해서 아주 혼이 났던 기억이 난다.
두 번째가 진명여고 근처였는데 그 때는 중앙학교에서 나보다 한 해 후배인 귀재 이수화(李秀和) 시인과 지금도 가까운 친구인 화가 심정수(沈貞秀)씨가 대표로 나와 함께 문학을 토론하고 삶의 진실에 관해 함께 고민하던 기억이 난다. 한결같은 것은 모두들 천재기질들로서 한가락하는 듯한 똥배짱을 보였다는 점이다. 생각난다. 그 재주꾼 이수화의 한구절.
‘살다 살다 못살면 지옥에나 가라지!’
그래.
중앙학교와 나는 아무래도 인연이 깊은 모양이다. 왜냐하면 세 번째 고3때의 준비모임인 동숭동 서울대학 앞 어느 이층 과자점에는 훗날 나의 든든한 사형이요 절친한 친구이기도 했던 저 유명한 드라마 작가 김기팔(金起八)씨가 나와서 중앙학교가 왜 이번에 참가하지 못하는가를 직선적으로 웅변했던 것, 그래서 모두들 분격했지만, 그 문인 특유의 똥배짱에 매혹되어 불평은 그저 투덜거리는 정도로 그쳤던 생각이 난다.
김기팔씨는 이미 그때 백기완 선생이 이끄는 학생 산림녹화대에 가담하여 나라를 걱정하는 작은 웅지를 불태우고 있었고 얼마 안있어 라디오 방송극 ‘해바라기 가족’으로 공모에 당선하여 돈도 벌고 이름도 유명해졌지만, 무엇보다도 트릿하면 트릿하다고 드리대는 그 서북기질의 배짱과 말술로 더 이름이 났던 한 시대의 걸물이었다.
마지막 장면은 배재학교 강당에서 문학의 밤이 열린 날이다.
다른 일들은 모두 자취없고 김관식 시인이 등단하여 서정주 시인이 자기 동서라고 자기소개 하며 대한민국에는 서정주와 자신밖엔 시인이 없다고 강변하여 느닷없는 학생들의 박수를 받은 일과 이화학교의 가녀리고 어여쁜 얼굴의 오혜령씨가 재치있는 수필낭독을 했던 것밖엔 생각 안난다.
그러나 그날은 바로 내가 ‘난파선’이라는 초현실적인 시를 낭독했던 날로서 그 이미지는 또 훗날 대학시절에 나의 창작극 ‘두개의 창(窓)’으로 드라마화한 나의 끈질기게 지속된 몇가지 해양 이미지중의 하나였던 것이다.
이어서 생각한다.
이런 일련의 행사들에 이끌려 나는 글을 쓰게 되었고 글을 읽게 되었다는 것. 그러나 참으로 문학에 깊숙이 파들어가게 된 것은 첫째 객지의 외로움과 존재의 어려움, 그리고 삶의 슬픔 때문이었고 둘째는 문예반의 절친한 친구들 때문이었고 셋째는 이인순 선생의 지속적인 지도를 상징하는 선생님의 노트 세권, 어려운 우리 토박이 어휘들을 모두 수집하여 거기에 뜻을 일일이 달아놓은 귀중한 노트 세권을 내가 물려받았다는 것이다.
이 노트를 가지고 나는 구체적인 우리말 공부를 조금이라도 하게 되었고 거기서 우리말의 깊이와 아름다움, 그 천변만화의 묘미를 깨닫게 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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