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3 학생들은 으시대고 폼은 잡아도 좀 점잔을 빼는데 고2 학생들은 때를 만났다는 듯이 뻔질나게 고1 교실을 드나들며 장광설을 늘어놓거나 잔소리를 하거나 때도 시도 없이 기합을 넣곤 했다. 그런데 그날도 고2의 한 간부학생이 하교시간인데도 두세 시간씩이나 교실에 붙잡아놓고 장광설을 늘어놓았다. 얘기인즉슨 제가 공부를 하기로 맘먹으면 우등생이 되고도 남을 것인데 학교를 위해서 억지로 감투를 쓰고 있다는 거였다.
제가 얼마나 공부를 잘하는지를 예를 들어가면서 유세하는데 조금 우스꽝스러운 실례를 들어서 모두 웃음이 나는 걸 지긋이 참고 있었을 때였다.
누구의 입에선가 마치 방귀소리처럼 왈
‘어쭈-’
고2 학생간부의 얼굴모양이 순간 형편없이 일그러지며 얼굴빛이 샛노오래졌다. 독사같이 모난 눈을 들어 장내를 휘둘러 보았다. 교실 분위기가 갑자기 싸늘해졌다.
‘누구야? 나와!’
나는 순간 깜짝 놀라 당황하기 시작했다. 왜냐하면 그 소리는 다른 사람 아닌 바로 내 입에서 튀어나온 소리였기 때문이다. 이걸 어찌하나?
‘좋은 말로 할 때 앞으로 나와!’
나는 최면에 걸린 듯 나도 모르게 벌떡 일어서서 괜히 실실 웃으며 비실비실 앞으로 걸어나갔다.
‘너야?’
‘이 짜아식이 웃어?’
단 한방에 기절해버리고 말았다. 간단해서 좋았지만 그 뒤로 나는 상급생들에게는 ‘꼴통’으로 찍혔고 동급생들에게는 엉뚱한 촌놈으로 따돌림을 받았다.
분명 중동기질이란 것이 있기는 있는 셈이었다.
***늑막염**
아무래도 두가지 운동을 함께 하는 것은 내게는 무리였다. 더욱이 열여섯 살의 객지살이에겐 지나친 부담이었다. 개학 후 불과 두 달 만에 나는 늑막염에 걸려 원주집에 돌아가 쉬게 되었다.
병원에 가서 늑막의 물을 빼내는 일과 극장에서 영화, 연극을 보는 것 이외엔 내겐 할 일이 없었다. 그 두 달 동안에 나는 시시각각 빛깔이 변화하는 치악산의 미묘한 아름다움을 알았고, 폭격으로부터 면제된 원주 남산 근처와 봉산동 배마을이나 우물시장 쪽의 구시가지 옛집, 옛 골목들을 어슬렁거리며 돌아다니는게 일꺼리가 되었다.
자기 땅에 붙어살아 익숙한 토박이 사람들의 느긋하고 한적한 붙박이 삶을 부러워했고 눈에, 마음에 깊숙이 그 삶의 모습들을 담아두려고 했다. 그 낡은 집들과 낡은 삶의 모습들은 강열하게 내 심상 속에 새겨진 채 퇴색되지 않고 한두 해 뒤 나의 초현실적인 시작들 속에 신화적으로 변형되어 나타나거나 대학초기에 원주에서 벌인 시화전속에서는 ‘그림시’들로 그 모습을 바꾸어 드러나기도 했다.
늑막염은 그 후 폐렴으로, 대학시절엔 다시 폐결핵으로까지 진전되어 나의 청춘을 병색으로 어둡게 만들어 놓았지만 늑막염은 그 두 달 동안 내안에서 공부에 대한 정성을, 공부를 통해 가난한 부모님께 은혜를 갚고자 하는 지극한 열성을 만들어 주었다. 그리고 삶과 세계에 대한 이상하리만치 서글픈 정조를 빚어내었다.
‘삶이란 슬픈 것이다.’
나는 그 무렵 단호하게 이렇게 말하곤 했으니 그런 슬픈 마음에는 다시금 공부하러 서울로 떠나던 그날 새벽, 원주역에 나와 배웅하던 어머니의 초라한 모습이 내 한시절의 슬픈 인상화로 새겨져 지금까지도 누우렇게 빛바랜 서글픈 사진처럼 뇌리에 그대로 남아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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