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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지하 회고록 '나의 회상, 모로 누운 돌부처' <7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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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지하 회고록 '나의 회상, 모로 누운 돌부처' <75>

미군

원주주변은 미군부대 천지였다.
그리고 양공주들 천지였다.
또 미군물품들의 천지였다.

내 몸과 마음을 구성하는 물질과 생각의 대부분은 무엇일까? 누군가 그런 말을 한 적이 있었던 것 같은데 아마도 우리의 몸과 마음의 99%가 양키들의 물건과 생각일거라는 것이다.

맞는 말일까?
나머지 1%는 도대체 무엇일까?
그 숱한 깡통들, 쵸콜렡들, 술들!

그리고 그 화려한 색채의 미려한 잡지책과 그 책의 사진들, 그림들! 그 무렵 미국은 가히 천국이었고 우리에게 꿈의 나라, 이상적인 나라였었다. 과연 우리들의 지금의 삶의 기준과 가치척도는 이 시절에 베어든 아메리카의 그것이 아니라고 감히 말할 수 있을까?

아버지와 어머니는 가끔 크게 다투시었는데 아버지는 벽에다 미군잡지에서 오려낸 미군 계급 순위의 표정변화를 그린 만화를 붙여놓았다. 쫄병 때의 유순한 얼굴이 계급이 높아짐에 따라 사나워져서 상사가 되면 사자나 호랑이처럼 되는데 어머니의 기분의 변화를 아버지는 그 그림을 짚으며 우스개소리로 표현하곤 했다.

잘라말한다면 우리의 삶의 금척(金尺), 우리 사회의 잣대와 원형은 이 만화와 같이 미국에서 그것도 미군 주둔부대에서 흘러나온 것은 아닐까?

아니라는 단호한 한마디를 몹시 듣고 싶으나 그런 대답은 별로 들리지 않는다. 바로 이같은 미군의 임나미국부(任那美國府) 같은 식민지적 존재가 원주였던 것이다. 그리고 지금까지도 용산이나 오산 등지가 그런 곳일 것이다.

나는 최근 한 무속인(巫俗人)을 만났는데 그는 다음과 같은 말을 했다.
‘향후 10년 세상은 많이 변할터인데 한국은 미국의 생활과 과학 기술들을 다 물려받아 자기것으로 하게 됩니다.
그럴까?

***서울**

중학을 졸업하자 내 장래를 걱정하던 아버지는 나를 서울로 유학시키기로 결정했다.
그때도 진학시험에 1차, 2차가 있었는데, 1차의 배재학교에 낙방하고 2차의 중동(中東) 학교에 합격하여 백농(白儂) 최규동 선생의 민족주의 색채가 짙은 운동과 주먹의 학교 중동에 진학하게 되었다.

‘운동과 주먹의 학교 중동?’
그렇다.
사변 뒤의 그 극심한 깡패들의 혼란 속에서 중동학교는 모표가 등록금의 반값이라 했다. 중동학생은 어디 가서든 깡패에게 매맞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만큼 중동학생 자신이 깡패중의 깡패요 주먹중의 주먹이라는 얘기다.

중동학교는 축구로 유명했었고 그 밖에도 각종 운동으로 이름나 있었다. 중동학생은 반드시 한가지 이상의 운동을 해야 한다고 했다. 그리고 축구시합 응원을 공부보다 더 중요시했다. 언필칭 ‘라이언 스피리트’, 즉 ‘사자정신’이 중동의 혼이라 했다.

‘브이 아이 시티 오 아르 와이
브이 아이 시티 오 아르 와이
중동 중동 빅토리
라 풀라 씨스 품마
중동 중동 빅토리
와아아아-!’

이것이 땡볕 불볕에도 운동장에 나가 앉아 맨날 외쳐대는 구호였다. 조금이라도 응원에 게으름을 부리거나 공부를 핑계로 빠지는 경우엔 선생과 선배들, 상급생들에게 된통 혼이 날 뿐 아니라 오로지 얻어터지기 일쑤였다.

학교에 입학하자마자 나는 농구와 태권도 두가지를 하도록 강압받았다. 본디 몸 움직임이 더디고 운동감각이 아둔한 내게 있어 두가지 운동을 함께 한다는 것은 도무지 무리였다. 나는 속으로 불만이 많았다. 그러나 고2, 고3으로 올라가면 자유롭게 풀어주고 공부도 열심히 시킨다고 했다. 고1 때는 정신훈련을 위한 기합을 넣는 과정이라 그런다고도 했다. 고2, 고3 학생들이 마치 군대의 상급자처럼 으스대고 폼잡으며 고1 학생들을 마구 짖뭉게고 때리고 이 잡듯 쥐 잡듯 하였다.

중동체제라는 이 모든 것이 마음에 들지 않았다. 시골에서 올라와 배재학교에 낙방한데 대해 매우 창피해했고 가난한 부모님을 생각해서라도 이제부터 열심히 공부하겠다고 속으로 굳게 다짐하고 있었기 때문인데, 입학하고 얼마 안있어 마침내 한 사건이 터지고 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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