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주에서도 간혹 그림은 그렸다. 그러나 내 스스로 그림은 포기하고 있었다. 어머니의 간절한 마음, 그림 그리면 배고프다는 일념이 나를 마음속에서 변경시킨 것이다. 그러나 미술시간엔 역시 신이 났고 내 그림이 미술 선생님에게 인정을 받아서 강원도 중학생 미술전에 출품되어 가작 입상을 한 적도 있다.
그 무렵 미술선생님의 자그마한 파스텔 그림에 매혹되어 몇 번이고 몇 번이고 크레파스로 그 언덕위의 붉은 소나무 그림을 흉내낸 적이 있다. 그러나 결국 만족스럽게 흉내낼 수는 없었으니 남의 그림은 결코 흉내낼 수 없는 것이고 도대체 ‘흉내’란 것은 예술과 무관하다는 한 고집이 그 무렵 생겨난 것 같다.
중학을 졸업할 때 공로상을 받았다.
그 상품들 속에 김태오(金泰午)의 ‘미학개론’이 있었다. 그 무렵에야 아무리 읽어도 그 뜻을 잘 알 수 없었으나 무엇인가 멋있는 학문이라는 것만은 희미하게나마 알 수 있어서 가끔 들춰보긴 했으나 본격적으로 본 것은 고등학교 3학년에 와서 진학을 결정할 때 완독을 하였으니 그때 그림을 그려서는 안된다는 강박 때문에 생활이 안정되는 대학교수와 그림 따위 예술전반에 가까이 갈 수 있는 미학이란 학문 사이의 절충책으로 미학과를 지망하게 된 그 첫 씨앗이 이 무렵에 심어진 셈이다.
미학은 어쩌면 나의 운명인지도 모르겠다. 지금은 거의 포기하고 있지만 나의 나머지 생애가 아마도 미학과 결합되리라는 예감은 강하게 있다.
***전봉흥(田鳳興)**
전봉흥을 만난 것은 나의 ‘데미안’을 만난 것이라 했다.
그러나 그와 내가 그리 가까웠던 것은 아니다. 다만 그의 그림, ‘북극의 오로라 속을 함께 가자’는 그의 선물 그림을 받아서 보고 또 보고 흉내 내서 그려도 보고 그러니까 가까이 있으면서도 말은 안하고, 그럼에도 내심으로는 그리워하는 그런 친구였다.
그의 그 오로라 그림은 기이한 것으로 펜과 수채물감으로 아울러 그린 것인데 아주 어두운 하늘에서 귀신빛깔처럼 돋아나는 오색의 오로라가 마치 무슨 신비한 짐승처럼 다가오는 듯 했다. 내게는 그것이 잘 알 수 없는 인생이라는 것 같기도 하고, 전봉흥이 함께 가자고 제안하는 이상적 삶의 모습 같기도 했으나 잘 알 수 없었고, 잘 알 수는 없었으나 그것 자체로서 매혹적이었다.
수업시간에 나는 그로부터 두세차례 이상한 쪽지를 받은 적이 있다. 그 첫 번째의 기억은 대개 이렇다.
‘치악산은 눈이 올 때마다 운다. 그것은 그 산을 구성하는 물질들이 눈의 냉기와 안 맞기 때문이다. 제1봉인 시루봉이 보통의 최고봉 답지않게 평평한 것은 눈보라에 의해 무자비하게 깎였기 때문이다. 산에도 감정이 있다. 치악산엔 그래서 아직도 여름의 신(神)이 산다’
두 번째의 기억은 또 이렇다.
‘치악산 영원산성은 양길과 궁예의 옛터전이다. 양길이 이곳에 주둔하기 시작한 것은 옛 예맥의 유민(遊民)들의 조직이 있었기 때문이다. 신라통일과 함께 사라져버린 예맥은 도대체 어디로 갔을까? 일본으로 갔을까? 만주나 러시아로 갔을까? 아마도 태백산맥으로 갔을 수 있지만 내가 보기엔 치악산 영원산성이다. 영원산성엔 비록 산정임에도 우물터가 수십군데나 있다고 한다. 우물터! 그것이 바로 그 증거다!
졸업을 하고 전봉흥은 서울의 경복고등학교에 진학했다. 그 뒤 서울공대를 거쳐 미국으로 떠났다. 그리고 내 삶과 시야에서 사라졌다.
그러나 지금도 생생히 기억되는 사건이 한가지 있다. 내 인생의 오로라와 관계가 있고 그가 전공한 물리학과 관련해서 우리가 함께 걸어갈 북극, 저 생명과 지구물질의 첫 기원과 인연이 깊은 그 사건을 생각만 해도 마음이 서늘해진다.
고등학교에 진학해서도 우리는 서울에서, 원주에서 가끔 만났다. 그 무렵 겨울 방학 때 원(元)씨 성 가진 한 친구가 치악산 중턱 마을에 있는 자기 집으로 우리 둘을 초대했다. 전봉흥과 나는 눈이 깊이 쌓인 그 산중턱의 집에 가 막국수를 먹고 놀았다.
그러던 중 수염이 길고 엄장이 큰 한복의 한 중년어른이 있는 구석 방으로 인도되어 들어갔다. 우리가 자리에 앉자마자 그 분이 이렇게 말을 했다.
‘베토벤이 죽어간 날 맑스가 태어났다.’
그리고는 중둥무이였다. 무슨뜻일까?
한동안 침묵이 흐른 뒤 그분은 다시 말을 꺼냈다.
‘베토벤이 이루지 못한 꿈을 맑스가 이루려고 했다.’
그리고는 더 이상 말이 없었다.
도사일까?
산사람일까?
태백산에서 내려온 빨치산일까?
깊은 눈에 빠지고 또 서로 손을 잡아 일으켜 세우며 돌아오던 길에 봉흥과 나는 그 어른에 대해 토론했다. 그때 봉흥이 한 말, 그 말이 영영 잊히지 않는다.
‘베토벤과 맑스 둘 다 실패다. 베토벤은 부르죠아의 문화 영웅이고 맑스는 프롤레타리아의 사상영웅이다. 둘 다 실패다. 이제 우리가 하자!’
‘우리가 하자!’
나는 이 한마디에 함축된 어마어마한 역사적 의미를 잊을 수 없다. 지금 전봉흥이 어디서 무얼 하는지는 알 수 없다. 그러나 그가 지금도 역시 나의 ‘데미안’인 것은 내가 지금도 그의 그 한마디, ‘베토벤도 맑스도 아닌 우리가 하자!’의 테마를 쫓고 또 쫓고 있기 때문이다.
여기에 이른 나의 심안에 전봉흥의 그 봉황새를 닮은 눈매와 검실검실한 얼굴모습이 뚜렷이 떠오른다. 그는 과연 누구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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