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재수가 생각난다.
부모가 다 안계신 아이다. 누님 집에 얹혀있었는데 우리집 바로 옆집이었고 원주중학교의 동급생이었다.
늘 어떤 슬픔 같은 것이 맺혀있었다. 그런 것을 가끔 내게 내비치기도 했었다. 지금까지도 조금 우스운 것은 그 김재수의 슬픔을 내가 소설로 쓴 적이 있었던 것이다. 어떻게 썼는지 기억도 안나는데 나로서는 그때 그 애의 사고무친한 처지가 너무 가슴 아팠었던 것 같다.
그런 것들이 문학의 출발이었을까? 하긴 중학교 2학년 때인지 3학년 때인지 국어시간 숙제로 시를 한편 썼는데 김소월을 흉내낸, 가을 코스모스 꽃에 관한 것이었다.
유기석이란 친구도 생각난다.
얌전하고 공부 잘하는 친구인데 독실한 가톨릭 집안으로 서울공대에 진학했는데 이후 못 만났다.
남영조란 잘생긴 친구도 있었고 모두들 내 이웃에 살던 친구들로써 동네 뒷 방축너머 봉천내에 나가 함께 멱감고 장난치던 사이다.
김창환이란 친구에게 누나가 있었다.
그 누나가 나에게 졸업기념 싸인첩(그 무렵의 유행이었는데 졸업기념으로 종이에 그림을 그리고 추억의 싸인을 해서 친구들에게 돌리는 것이다)의 그림을 그려 달라고 밤에 자기 방에 불렀던 일이 생각난다.
그 방에서 나는 국민학교 일학년 때의 여선생님 방에 갔을 때를 기억했다. 그리고 뽀오얀 그리움 같은 것, 아련한 연정(戀情) 같은 것이 싹트는 것을 느꼈었던 것 같다. 창환이 아버지가 갑자기 방문을 열어제켜 깨져버렸으나 ‘누나’라는 호칭에 연속된 아리따운 감정이 그 무렵 한때 나의 정서를 사로잡았던 것이 기억난다.
***포르노**
아버지는 나를 많이 걱정하셨던 것 같다. 공부엔 취미를 잃고 영화, 연극에만 빠져있었으니 걱정되실 수밖에.
걱정할 수밖에 없는 일이 실제로 일어났다. 그러나 내 스스로 비밀 속에 묻어버렸던 일이다.
어느날 밤 새벽녘,
나는 조그마한 창밖으로 동네 아주머니들이 극장으로 수군수군대며 들어가는 것을 우연히 보게 되었다. 무슨 일인가 호기심이 발동한 나는 나만이 아는 극장 통로로 해서 극장 영사실 위의 천정 서까래 위로 기어 올라갔다. 나는 깜짝 놀랐다. 이미 시작된 영화는 과연 놀랍고 놀라운 내용이었다. 미국의 이른바 ‘에로영화’였는데 지금 생각해보면 ‘포르노’치곤 지독한 ‘하드코어’였었다. 남녀의 성기(性器)가 모두 노출되어, 노출 정도가 아니라 클로스업 되어 마치 기차의 피스톤처럼 왕래반복하는 것이었고 끊임없는 오랄쎅스가 계속되는 것이었다.
아주머니들은 낄낄대고 있었다.
그러나 그 높은 서까래위에 도둑놈처럼 엎드린 열다섯 살 내 인생에는 청천벽력과도 같은 일대 사건이 일어나고 있었던 것이다. 쎅스가 내 어린 뇌수를 점령한 것이다. 그것도 지독하게 노골적인 포르노가.
언젠가 구성애씨의 ‘아우성’을 들으며 포르노야말로 건전한 성(性)을 더럽히는 최대의 적이라는 말에 내 마음의 밑줄을 그었던 일이있다.
그렇다.
포르노는 사실의 성이 아니다. 사실, 현실의 성이 아닌 과장되고 분식된 무책임한 포르노는 그래서 불륜이나 성매매까지도 부끄럽게 생각하지 않도록 만드는 반윤리적 폭력이 되는 것이다.
스물여덟이던가 한번, 마흔 살엔가 또 한번, 그리고 쉰살에 다시 한번 포르노를 본 적이 있다. ‘소프트코어’였으나 역시 성을 왜곡시키는 데엔 다름이 없었다.
나는 유년기에 악동들로부터 성기를 매질당한 적이 있다. 그 뒤로부터 이상한 분열에 시달린 적이 있다. 기이할 정도의 성 수치심과 역시 호색적일 정도의 성 집착의 상호모순된, 얼크러진 성의식이 그것이다. 원주에서의 포르노 사건은 유년기의 성 분열에 불을 붙였다.
돌이켜보건대 나의 성은 건강하지 못했다.
그 결정적 원인이 바로 이 포르노사건에 있었다. 영사실 조수가 아버지 몰래 동네 아주머니들과 짜고 미군부대에서 빌려다 트는 그 포르노. 아버지의 걱정은 적중되었다. 왜냐하면 그뒤 판잣집 극장 화장실의 엉성한 판대기 사이로 가끔 여자들의 성기를 훔쳐보는 일이 있었기 때문이다. 내 소년기 청년기의 음울한 성격 형성이 시작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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