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인화면으로
김지하 회고록 '나의 회상, 모로 누운 돌부처' <71>
  • 페이스북 공유하기
  • 트위터 공유하기
  • 카카오스토리 공유하기
  • 밴드 공유하기
  • 인쇄하기
  • 본문 글씨 크게
  • 본문 글씨 작게
정기후원

김지하 회고록 '나의 회상, 모로 누운 돌부처' <71>

극장

원주시절의 내 정신은 학교보다는 극장에 더 매달려 있었다.
원주 전진극장은 판자집이었다. 판잣집 치고는 큰 판잣집이었지만.
인근엔 군부대가 지천이어서 그 군인들이 주요 관객이었다. 주로 영화를 상영하였고 중간중간에 육군 군예대 소속의 악극단이나 창극단이 와 공연하였다.

게리 쿠퍼나 크라크 게이블, 쟝 마레, 쟝 캬방과 샤르르 보아에 스잔 헤이워드나 마릴린 몬로 등의 이름은 늘 내 입에서 떨어지지 않았고 연극 배우로도 김승호, 이예춘, 황해, 허장강 등이, 그리고 잇달아서 최무룡, 최은희, 김진규의 이름이 수시로 오르내렸다. 신카나리아니 박단마니 황금심, 고복수와 현인, 남인수 등의 가수들, 임춘앵, 김진진 등의 창극 소리꾼들까지 왼갖 딴따라라는 딴따라는 모두 다 알게 되었다.

훗날 연극이나 연예 쪽에 긴밀히 결합된 문화운동의 방향으로 내가 나아가게 된 데에는 이 시절의 배경이 결정적 작용을 하게 된 것 같다.

그러나 솔직히 말해서 나는 기질적으로 연예와는 거리가 멀다. 집단예술보다 개인예술 쪽에 가깝다는 말이다.

비록 동네아이들과 각목으로 펜싱 흉내도 내고 배우들의 몸짓을 따라하기도 했지만 내 마음은 도리어 극장 간판을 그리는 선전부의 그림 그리는 방, 선전실에 가 있었다. 자금은 어떨는지 모르나 그 무렵만 해도 극장이나 연예계에는 전문용어가 거의 다 일본말이었다. 그 무렵에 나는 ‘복가시’나 ‘후까지’같은 말과 그림 기술을 배웠다. 별 쓸모도 없는 기술이었지만, 그때는 그것들이 모두 놀랍고 신기할 뿐이었다.

그리고 ‘마찌마와리’니 ‘이로꼬미’니 해서 호객행위의 일본말도 알게되었다. 과연 영화나 연극의 상영공연 시간이 돼서 나팔을 불고 북을 칠 때는 내 스스로 영화의 주인공이나 극단의 단원이 되어 들뜨고 설레는 마음으로 어깨를 움찔거려쌌기도 했다.

좋게 본다면 ‘신명의 인생’이었고 나쁘게 말한다면 ‘하루살이 인생’이었다. 그리고 프로그램이 끝나면 술판이었다. 극장 어른들은 밤마다 우리집 그 쬐끄만 방에 몰켜앉아 통조림 배이컨을 전기난로 위에서 오징어, 고추장, 김치와 함께 볶으며 그 독한 카나디안 위스키를 마셔대었다.

아버지는 이름을 바꾸어 쓰셨다. 본명인 김맹모(金孟模)를 김석주(金石舟)라 했다. ‘돌로 만든 배’다. 가라앉을 수밖에 없는 팔자라는 뜻일까?

지금도 방송국이나 연극무대의 세트를 그리는 전문가로 활약하는 최연호 선생이 그때 극장선전부로 있었는데 재치가 있는 분이라 아버지 성씨인 김씨를 금씨로 바꾸어 ‘금석주(禁夕酒)’, ‘저녁술을 삼가라’로 지어 불러 사람들을 웃게 했던 것이 기억난다.

***귀신**

원주도 대구처럼 고원분지다.
겨울엔 몹시 춥고 여름엔 몹시 덥다.

어느 해였던지 몹시 더운 여름날 밤이었다. 아버지와 극장 ‘기도’(입구에서 표 받는 담당)였던 신기철(申基徹)씨가 선선한 무대에서 잠을 자다가 일어난 일이다.

무대 뒤편 화장실 가까이에 동네 우물이 있었는데 그 우물에서 한 밤중에 물깃는 소리가 들렸다. 아버지와 신씨는 이상하게 여겨 같이 나가 보았더니 하얀 소복을 입은 웬 젊은 여자가 물을 깃고 있었다. 아버지가 한 밤에 웬 물이냐고 물었더니 돌아가신 아버지 제사 때문이라고 대답했다. 아버지는 당신이 대신 물을 길어주겠노라고 팔을 걷어붙이고 나서서 물을 길었는데 새벽넘어 훤한 아침까지 혼자서 물을 열심히 열심히 길었었다. 신씨는 어찌되었을까?

신씨는 아버지가 그 여자와 첫 수작을 할 때 그 흰옷의 여자가 자기를 흘깃 돌려다 보는데 얼굴이 똑 여우같은 괴물임을 발견하고 그만 기절해버렸었다. 그래서 최연호씨는 신씨의 이름을 ‘신기절(神氣絶)’ ‘귀신을 보고 기절하다’로 고쳐 불렀다. 하기야 귀신은 귀신이었나보다. 그 이튿날 환한 낮에 그 근처 동네에 샅샅이 물어봤으나 제사 있는 집은 없었으니까.
귀신은 과연 있는 것인가?

단언한다. 귀신은 분명히 있다.

이 기사의 구독료를 내고 싶습니다.

+1,000 원 추가
+10,000 원 추가
-1,000 원 추가
-10,000 원 추가
매번 결제가 번거롭다면 CMS 정기후원하기
10,000
결제하기
일부 인터넷 환경에서는 결제가 원활히 진행되지 않을 수 있습니다.
kb국민은행343601-04-082252 [예금주 프레시안협동조합(후원금)]으로 계좌이체도 가능합니다.
프레시안에 제보하기제보하기
프레시안에 CMS 정기후원하기정기후원하기

전체댓글 0

등록
  • 최신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