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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지하 회고록 '나의 회상, 모로 누운 돌부처' <6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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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지하 회고록 '나의 회상, 모로 누운 돌부처' <69>

원주로 떠나기 며칠전 밤이었을게다. 언덕위의 우리집으로 가던 길인지, 아니면 우리집에서 외가로 가던 길인지 모르겠다. 하여튼 12시가 넘은 캄캄 밤중에 나는 검은 골목길에 홀로 서 있었다.

바람은 불고 하늘에 달이 떠 있었는데 새카만 집들이 울렁울렁 숨을 쉬고 있었다. 다 죽은 듯 고요한 속에 빛이라곤 달빛뿐이었다.

그렇다.
그것이 밤이었다.
그리고 자궁이요 어머니였다.

나는 숨도 안쉬고 가만히 서서 그 대지의 광경을 내 안에 새기고 있었다. 나는 자주 그 밤의 검은 풍경를 생각한다. 그러면 하등의 갈등이나 불만 없는 고요와 평화에 잠긴다. 즉 죽음이다.

나는 그 기억과 함께 죽는 것이다. 일체의 환상이나 기대, 망상도 버리고 그저 그 캄캄한 대지의 호흡에 몸을 맡기는 것이다. 지금도 내 방을 ‘검은 방’이라 하여 새카맣게 해놓고 잔다. 그러면 잠을 푹자게 되는 것이다.

그러나 생각이 여기까지 미치면 꼭 뒤따르는 우스꽝스러운 얘기가 이 밤의 영상을 깨트려 버린다. 우리 어머니 얘기다.

우리집과 외가 사이에 신작로, 즉 국도가 있는데 거기 통금시간이 넘으면 방위대 아저씨들이 보초를 선다.

외가에서 밤늦게 놀다가 우리집으로 가기위해 길을 건너려면 보초에게 들키게 된다. 그런데 한번은 어머니가 외가에서 나와 길가에 이르자 보초가 저 건너 있는 것을 보고 옆집 담벼락에 붙어 몸을 숨겼던가보다. 보초가 이것을 보고 있다가
‘거기 왜 붙어서있오?’
하고 물었던가보다. 성미급한 우리 어머니가 즉각 대답하기를
‘당신 지나가면 건너갈려고 그랬소.’
보초가 왈
‘별 사람 다 보겠네!’
이것이 나의 새카만 밤의 기억 그 마지막이다.

***사투리**

그해 겨울 원주는 몹시 추웠다.
대구처럼 고원분지인 원주는 매서운 눈보라 속에서 견디고 있었다.
나는 어쩌면 남쪽에서 지니고 온 동백꽃 냄새나는 사투리로 그 첫겨울을 포도시포도시(겨우겨우) 견뎌낸지도 모른다.
목포는 눈도 잘 오지 않는 따뜻한 곳이었기 때문이다.

치악산이 바라보이는 허허벌판에 원주 중학교의 바라크 건물이 서 있었다. 그 한 교실에 들어선 나는 담임선생이 맡은 첫 시간 수학시간에 인사말을 해야만 되었다.

왠지 몰랐다.
아이들이 킬킬거리며 웃고 야단이었다. 왠지 모르고 엉겁결에 자꾸 이어서 말을 해댔다. 아이들이 배꼽을 움켜쥐고 강그라졌다. 내 말투 때문일 것이라는 생각이 얼핏 들면서도 그렇게까지 웃을줄은 상상 밖이었다. 윗녘의 그들에게 아랫녘의 끝, 전라도 사투리는 참으로 낯선 것이었을게다.

‘나는 목포중학교 다녔는디라우 잉-
이름은 김영일이라고 하는디라우 잉-’
아마도 이랬을 것이다.

그러나 이번엔 자리에 가 앉은 내가 도리어 웃음을 참지 못하고 끅끅대어야 했다. 담임선생인 수학 선생의 함경도 사투리 때문이었다.

‘무스거 수학책 배웠음?’
이게 무슨 말일까?
아마도 무슨 수학책을 배웠느냐는 물음 같았다. 나는 얼버무려 대답을 하느라고 더욱 더 아이들을 웃겼다.

사투리의 거리.
그것이 나와 아이들을 분리시키고 있었다. 쓸쓸했다. 그때 키가 큰 한 아이가 내게 성큼성큼 다가왔다. 검실검실하니 참으로 잘생기고 훤칠한 봉안(鳳顔)의 그 애는 내개 책 한권을 내밀었다.

‘이것이지?’
수학책이었다.
‘응-’
‘나 전봉흥(田鳳興)이라고 해’
평안도에서 월남했는데 반장이었다.

그날, 나는 전봉흥을 만난 것이다. 그리고 훗날대학에서까지 내내 서로 교류한 영혼의 친구, 나의 ‘데미안’을 만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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