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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지하 회고록 '나의 회상, 모로 누운 돌부처' <6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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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지하 회고록 '나의 회상, 모로 누운 돌부처' <68>

연극

한동안 내겐 지독한 연극열이 붙어다녔다. 차차 말하게 되겠지만 그 씨앗이 이 무렵에 싹트지 않았나 싶다.

‘만열네’의 연극이었는데 내 작은 외삼촌인 정일성이 대본을 쓰고 만열이가 연출하고 공수라는 키 큰 형이 임금을 하고 내가 간신배로 출연하는 사극이었다. 외가의 그 큰 대청마루를 무대로 하고 안방을 입장하는 박스로 건넌방을 퇴장하는 박스로 해서 동네 애갱치들과 아주머니들 상대로 딱 하룻밤 논적이 있다. 그 이상은 기억나질 않는다.

그리고 또 하나 ‘마굴의 도피자.’
큰 외삼촌 정세환씨가 대본 연출을 다 맡고 동네 청년들이 대리 출연한 반공연극이었는데 역시 외가 대청마루에서 발표한 것으로 줄거리는 기억이 안난다. 그렇다.

연극은 일종의 광기다. 왜냐하면 차원이 달라지기 때문이며 실존적 전환이 일어나기 때문이다. 그래서 무대에 서는 사람 자신이 이상해지고 무대를 바라보는 사람도 근본적으로 자기를 이탈하는 기이한 경험을 하게 되는 것이다. 배우야 말로 수많은 종류의 실존을 사는 사람일 것이다. 운명을 넘어서는 일종의 탈출인 셈이다.

어렸지만 연극의 이런 이상스러움이 내 가슴에 들어오고 있었다. 그러나 지금 생각해봐도, 대학 때, 대학 뒤의 저 30여년 전의 열풍과도 같던 그 문화운동을 생각해봐도 내게는 연극이 적실하게 알맞지는 않는 것 같다. 그것은 내가 조금은 기민하지 못한 촌놈이기 때문이고 늘 낙지같이 못났기 때문이다.

하긴, 연극 때문에 멍청한 촌놈이 조금은 말 잘하는 도시놈이 되긴 했지만, 아직도 나는 연극으로부터는 멀리 있다. 틀림없다. 연극을 보러가면 우선 막 열리기전에 가슴부터 뛰니까. 그것이 흥분 때문이 아니라 당황감 때문이니까.

***음악**

음악이야말로 나는 잘 모른다.
악보 읽을 줄을 모른다. 콩나물 대가리 말이다. 대학에서 이혜구 선생님께 음악미학을 공부했고 학교 앞 별장 다방과 학림다방에서 지겨울만큼 긴 세월을 지겨울만큼 넌더리나게 넌더리나게 클라씩을 들었지만, 베토벤과 모차르트 등 몇 사람 외엔 이해하지도 좋아하지도 않았다.

내 음악은 유행가나 가요가 전부다.
그러니까 노래는 두 이모로부터 배운 것들이다. 백기완 선생이 어디에선가 나를 한자리에서 수백곡을 불러제치는 ‘노래노동자’라고 말한 적이 있다는데 그리 틀린 말은 아닐 것 같다. 그 숱한 노래를 거의 모두 큰 이모로부터 배웠다. 필요하면 손바닥만한 유행가책을 보면서 2절, 3절까지 익혔다.

그러나 작은 이모로부터 배운 것도 있다. 목포의 항도여중 음악선생이었다는 이름도 모르는 한 전설적인 월북 예술가의 작곡으로 전라도 사람들이나 6.25 때 상처받고 그 부근 사람들 외에는 잘 모르는 노래다. 내가 이 노래를 부르면 그 부근 출산 사람들은 금방 나와 친해진다. 그것이 무슨 이유일까?

동병상련.
아마 그것일게다. 폐결핵으로 죽어가는 애인을 위해 쓰여졌다는 첫 노래와 마약으로 인해 죽은 애인을 위해 쓰여졌다는 둘째 노래가 다 같이 깊은 감상(感傷)과 비탄(悲嘆)의 노래다. 조금은 너무 도를 넘은 쎈티멘탈리즘인데 그쪽 사람들의 짙은 감성, 6.25 전후의 슬픈 기억에는 적합성이 있나보다. ‘부용산(芙蓉山)’과 ‘양귀비’가 그것이다.

부용산 오릿길에
잔디만 푸르러 푸르러
솔밭사이 사이로
회오리 바람타고
간다는 말 한마디 없이
너만 가고 말았구나
피어나지 못한 채
병든 장미는 시들었구나
부용산 산허리엔
하늘만 푸르러 푸르러

이것이 ‘부용산’인데 부르는 스타일에는 두 갈래가 있다. 여수순천쪽 버전과 목포광주쪽 버전이 다르다.

다음은 그보다 더 짙은 감상의 노래인 ‘양귀비’인데 아는 사람이 더 드물다.

슬픈 여음(余音)
전설처럼 지니고
양귀비는 다시 피어납니다
양귀비의 꽃은 님을 병들게하고
양귀비 들창앞에 피던날
님은 날 버리고 가셨드랍니다
양귀비가 피면
내마음에 함박눈이 내립니다
별처럼 함박눈이 내립니다.

예술에 있어 감상과 비탄이 절실할 때가 있다. 그러나 그것은 잠시다. 감상과 비탄이 지나치면 그것은 곧 부패한다. 그런데도 전라남도쪽 나의 동포들은 요즈음은 또 달라졌겠지만 감상과 비탄을 ‘즐긴다’고까지 할 정도로 깊이 침윤되어 있다. 왜일까?

한(恨)
그것 때문일게다.
집권까지 한 지금 그것은 많이 가셨을까? 아니면 지금도 원천적인 한은 그대로 남아서 술에 취하면 광주사태에 관련된 슬픈 노래들을 ‘부용산’이나 ‘양귀비’ 부르듯 부르고 있을까? 아직도 전라도는 ‘밤’인가?

아마도 이 ‘밤의 의식’이 내 시의 출발점일게다. 이 ‘밤의 의식’, ‘슬픔’이 없었다면 나의 저항적 감성의 싹은 틔울수가 없었을테니 ‘부용산’, ‘양귀비’도 한 몫은 한 셈일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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