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정리 시커먼 뒷산에 붉고 푸른 분점이 무수히 지나가며 ‘쓰쓰또또-쓰쓰또또-’ 무선음을 다시금 내기 시작하고 연동 다리뚝밑 시커먼 뻘밭에 붉은 관을 등에 진 웬 사내가 피투성이가 되어 꺼꾸러졌다 일어섰다하며 허우적거리는 영상이 다시금 나타나기 시작했다. 사람들은 삼삼오오 떼를지어 밤마다 수군대기 시작했다.
쌀알갱이까지 낱낱이 세어서 현물세를 멕이니 일본놈들 공출하던 때보다 더하다는 것이었고, 밤마다 집집이 돌아가며 운력동원을 하여 유달산 너머 해안에 시커멓게 먹칠한 통나무를 꽂아놓고 토치카를 사방에 파서 바다위에 또 배에서 보면 꼭 대포를 숨긴양 보이도록 위장하는 것이 영낙없이 일본놈들 망할때와 비슷하다는 것이었다.
여기서 수군수군 저기서 두런두런이었다.
또 바다에서 사람우는 소리가 밤마다 들린다는 소문이 나돌고 고하도(高下島) 이순신 기념비가 피땀을 흘린다는 소문도 나돌았다. 끝인가?
***달밤**
그러던 어느날 밤이었다.
훤한 보름달이 휘영청 비치는 큰집 마당에 나는 앉아있었다.
갑자기 비녀산 쪽에서 콩볶듯 총소리가 계속 들려왔다. 그러자 할머니가 달을 쳐다보며 벌떡 일어나 큰 소리로 울부짖기 시작했다.
‘아이고오오오 문태야아아-
아이고오오오 문태야아아-’
오동나무거리 교화소에 갇혀있던 반동분자들을 비녀산 뒤로 모조리 끌고가 총살한 뒤 집단매장 한다는 소문이 그날 낮부터 온동네에 이미 다 퍼진 뒤였다. 할아버지는 방에서 나오시지 않고 할머니만 계속 울부짖고 계셨다.
좌우익 양쪽에 아들들을 둔 한 어머니의 울부짖음.
한 아들이 총살당하는데 다른 아들은 빨치산으로 입산(入山)하는 그 비극적 교차점이 어찌 우리 곰보할매의 그 휘영청 밝은 달밤의 통곡뿐이겠는가!
한반도의 도처에서 그와 같은 얄궂은 비극은 똑같이 되풀이되었던 것이니 훗날 나는 수차례에 걸쳐 바로 이 어머니의 아프고 안타깝고 찢어지는 마음이 새로운 논리가 되고 근본적 사상이 되고 첨단의 철학과 문화가 되어 좌익의 큰아들이 승리할 때 우익의 작은 아들을 걱정하고 우익의 작은아들이 진주할 때 좌익의 큰 아들의 입산(入山)을 근심하는 모성(母性)의 압도에서 완전통일 조국과 새문명의 핵을 찾자고 강론한 적이 있는데 바로 이날 밤, 그 휘영청 달밝은 밤의 긴긴 통곡 속에 내 생각의 뿌리가 내려있는 것이다.
달빛.
이 일을 기억할 때마다 그 밝고 밝았던 그날 밤 달빛이 생각난다. 그런데 그날 밤 달빛을 유난히 날카롭게 기억하는 것은 사실은 내가 아니라 바로 문태숙부였다.
그 밤, 비녀산 뒷켠 산기슭에 끌려가 구덩이를 파던 숙부는 등 뒤에서 총성이 시작되자마자 본능적으로 몸을 날려 구덩이에 뛰어들었다. 한참있다 총성과 아비규환이 지난 뒤 피범벅의 송장들 틈에서 더듬더듬 기어나온 숙부에게 산을 내리는 길을 찾도록 도와준 것이 바로 그날밤의 그 밝은 달빛이었다. 친척집에 숨어들어 골방에 몸을 숨겼다가 숙부는 거기서 국군수복을 맞았고 그 길로 공비토벌하는 전투경찰에 곧바로 입대했다.
***입산**
국군이 들어오고 있었다.
나는 그날 집에 있지 않고 ‘만열네’와 함께 집 뒤 산비탈에 올라가 있었다. 천지를 뒤흔드는 함포(艦砲) 사격소리와 함께 쓍쓍거리며 포탄과 총알이 귀곁을 스쳐갔다. 산비탈 아래 저만치 영산강가의 길에는 목포시내로부터 수많은 사람들이 몰려나와 영암 월출산으로 건너는 명산(明山) 나루를 향해 뛰어가고 있었다.
인산인해.
그 쌔하얀 사람 물결 속에 아버지가 있었다. 그리고 역시 남로당원이었던 백부가 있었다.
얼마 안있어 어머니는 한 친구와 함께 아버지를 찾아 명산나루를 향해 떠났다.
날이 저물고 있었다.
나는 혼자였다.
텅 빈 집안에 나는 혼자였다.
인민군은 후퇴해 나가고 없고 국군은 아직 목포 변두리까지는 채 진출하지 않은 공백 속에 부모님 다 떠나고 나 혼자였다. 유리창 밖의 새카만 어둠을 내다보며 내 유년과 성년기를 일관했다. 그 두려움, 버림받을지도 모른다는 그 두려움에 몸을 떨고 있었다.
밤은 새카맣게 썩어있었다.
마치 만지면 손도 썩어버릴 것 같았다. 밤이 그렇게 보였던 적은 그 이전에도 그 이후에도 없었다. 오직 그날 밤 기이하게도 그랬다.
새카맣게 썩은 밤.
그 이튿날 아침부터 가까이서 총소리가 계속 들려왔다.
내다보니 우리집 건너편, 그러니까 나 다니던 산정학교 뒷산에 흰옷 입은 사람들이 하얗게 쓰러져 쌓여있고 또 끊임없이 그 위에 쓰러지고 있었다. 쓰러지고 나서야 총소리가 쾅하고 울리곤 했다.
기이한 죽임의 광경이었다. 흰옷이 흰옷위에 쌓였다. 그것은 그림이었다. 피와 눈물과 외침이 소거된 메마른 그림으로서의 죽임이었다. 코리아의 학살!
대학시절 보게 된 고야의 ‘학살’ 그림이나 피까소의 ‘코리아의 학살’의 구도 그대로였다.
죽임은, 특히 학살은 그것을 본 사람을 부패시킨다. 잊고자 애쓰는 동안 인간성을 잃어버리게 되는 것이다. 그래서 그날 밤처럼 새카맣게 썩은 밤을 몇날 며칠이고 지새우게 되는 것이다.
죽임은, 특히 학살은 어린이 안에 허연 영감을 들여앉힌다. 그리고 그 영감은 온갖 스산한 불행의 감각과 현실이 증발한 미신과 바보같은 망각을 불러오는 것이다.
전쟁은 어린이에게 맞지 않는 옷만을 입히는 게 아니다. 전쟁은 어린이에게 알맞지 않은 생각도 들씌어준다. 생각! 삶의 기술이자 삶의 주체이기도 한 그 생각을, 그 숱한 잘못된 생각들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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