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날.
그날 공습은 그야말로 대공습이었다.
그 저녁녘 상리에서 본 목포하늘은 시뻘건 불바다였다. 불바다! 아니 불바다 이상이었다. 한자의 ‘황(荒)’이라는 단어의 지옥의 이미지로 밖에는 그날의 불바다를 묘사할 재간이 없다. 그 불바다 속에 아버지가 있는 것이다.
‘아버지!’
불바다는 점점 더 치열해졌고 황막해졌다.
‘아버지가 죽는다!’
이 한 생각, 일념(一念) 외에는 아무것도 없었다. 아무도 말릴 수 없었고 말릴틈도 없었다. 나는 갑자기 뛰기 시작한 것이다.
‘아버지!’
아버지를 내내 부르며 이십여리 시골 길을, 자빠지며 엎어지며 논두렁 밭두렁 길로 뚝으로 언덕과 둔덕들을 넘고넘어 나는 목포를 향해 뛰었다. 여기저기 찢어지고 깨지고 멍들고 얼들면서도 오로지 한 생각뿐이었다.
‘아버지를 살리자!’
그날 저녁과 밤의 하늘빛을 기억한다. 짙푸른, 그리고 동시에 시뻘건 지옥.
허겁지겁 뛰어든 언덕위 우리집 대청 마루에서 아버지는 부채를 부치며 라디오를 듣고 계셨다.
‘니 으짠 일이냐?’
아버지가 무사한 것을 확인하고 안심하면서 그 길로 나는 기절해버렸다.
사랑.
나는 그것을 잘 모른다.
나는 그것을 이렇게 원색적으로 밖에 표현할 줄 모른다.
언젠가 에릭 프롬 왈 사랑에는 테크닉이 절실히 필요하다고 했겄다.
아버지는 할아버지에게 무뚝뚝한 사랑밖에 할 줄 몰랐으니 내가 아버지에게 무뚝뚝한 사랑밖엔 할 줄 몰랐다. 그러매 내 아들들이 내게 무뚝뚝한 사랑밖에 할 줄 모르는 것은 당연한 일!
내 아들과 내 사이를 표현하는 가장 적절한 말은 ‘소 닭보듯 닭 소보듯’인데 올해 3월 내 환갑생일에 밖에서 돌아온 내가 내 책상위에 댕겅 놓여있는 조그마한 케이크 상자 하나를 발견하고 ‘아하, 원보녀석이로구나!’
뭐 이렇다.
테크닉이 없으니 집안이 쓸쓸할 수밖에 없다. 무뚝뚝하고 쓸쓸한 것. 그리 좋은 일은 못된다. 사랑에는 테크닉이 절실히 필요한 것이다.
***뒷방**
그날 이후 나는 고집을 세워 목포에 그냥 눌러 있었다.
큰집 돌담너머 봉제 삼춘네 집 뒷방.
머리는 빡빡 깎은 채 바지저고리를 입은 문태숙부가 들어서는 나를 보고 환하게 웃었다. 악질 부화분자 즉 깡패로 찍혀 교화소에 갇혀 있다가 정일담이 손을 써 풀려난 것이다. 황량한 황량한 얼굴에 환한 웃음이 번지는 것은 천만다행이었다.
내가 앉자마자 다짜고짜 숙부 왈
‘영일아! 니 나한테 노래 가르쳐주라! 장백산 줄기줄기! 비겁한 자야 갈라면 가라! 응, 해주지?’
그러면서 노래를 자꾸만 자꾸만 해대는데, 두 눈에 겁이 잔뜩 실려있었다. 노래를 부르지 않으면 다시 가두겠다고 한 걸까? 아니면 정말 공산주의 교육을 단단히 받은 것일까? 아니면 정신이? 계속 노래 얘기만 하고 노래만 불러대어서 이상한 기분이 들어 조금 있다가 슬며시 나와버렸다.
그 후 며칠 안있어 숙부는 다시 끌려가 오동나무거리 교화소에 갇혀버렸다.
국군이 다가오고 있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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