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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지하 회고록 '나의 회상, 모로 누운 돌부처' <5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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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지하 회고록 '나의 회상, 모로 누운 돌부처' <52>

휘파람

강은 어머니.
강가에 마을과 숲과 시뻘건 황토언덕들이 이어진 것을 보면 어머니 젖을 빨고 무릎에 앉고 또 손을 잡고있는 아이들 생각이 난다. 어머니는 그 모든 아이들을 보살핀다.

강은 말없이 그 모든 마을과 숲과 황토와 사람들을 보살핀다. 그래서 강가에 있거나 먼곳에서 강을 보면 안심이 된다. 근심걱정이 강과 함께 사라진다.

뜨거운 여름 낮.
부엉산에 올라가 희디흰 삐비를 뽑아 먹거나 둔덕 위 참외 밭에서 참외 서리를 하면서도 문득 강물과 강물 줄기위에서 반짝이는 태양을 보면 왠지 안도감이 왔고 세계와의 불화로 인한 쓰라림이 흐뭇한 장난끼로 변하곤 했다. 그리고 저 푸른 강에는 없는 것이 없어 보였다.

한번 하당 뚝길을 지나 숲에 가까이 갔을 때 그 짙은 숲그늘에 수많은 인민군 부상병들이 앉아있거나 누워있는 것을 보았다. 모두들 스물 안팎의 청년들로 눈이 에미령하니 착해보였고 거기서서 빤히보고 있는 나에게 저마다 하얀 미소를 보내곤 했다.

지금도 기억한다.
나는 하당 숲에서 돌아오면서 마음이 너무 아파 강물에 대고 연신 빌었다.

‘저 인민군들을 고쳐주소서’
‘다아 낳게 해주소서’
그럴라치면 푸른 강물이 똑 해남 산이면 큰이모네집 뒷어덩의 늙은 솔님처럼
‘괜찮다- 괜찮다- 괜찮다’
하는 것 같아서 마음이 아주 편안해져 그날 밤은 깊은 잠이 들어 큰 부엉이 꿈을 꾸다가 오줌을 싸버렸다.

오줌을 싸고서도 드물게 그 이튿날 아침 나는 갯가에 나가 만열이에게 배운 휘파람을 마냥 불었다.

훗날.
아주 먼 훗날.
어두운 해남 남동집 귀퉁이 방에서 깊이 앓았던 그 무서운 전율과 매혹의 날들! 해월 최시형 선생이 눈물 흘리는 집 잃은 두 아이를 끌어안고 옛 휫파람을 불어달래는 환영에 쌓여 크게 아팠던 기억이 되살아 온다.

휘파람!
옛 휘파람!

***상리**

부줏머리가 불안해서였을꺼다.
외가는 그곳에서 더 깊은 시골인 상리로 옮겨갔다. 옮겨간 집은 아주 큼직한 초가로 연밭곁에 있었다.

가던 날로 연밭에 들어가 연뿌리를 잔뜩 캐어다 간장에 조려 먹었는데 처음 먹어보는 연뿌리 맛이 어찌 그리 맛있고 향그러운지 지금까지도 잊히지 않는다. 그집 주인네 계집애 일품 노래도 이어서 생각난다. 북한 국가였는데

아침에 일어나서 밥묵고
저녁에 밥묵고 잠자고-

딱한 것은 틈만 나면 고래고래 돼지 멱따는 소리로 종일 불러댄다는 것이다. 죽을놈은 일부러 죽을자리 찾고 가는 날이 장날이라더니 옮겨간지 며칠 안돼서 동네에 두가지 사건이 한꺼번에 일어났다. 하나는 나 다니던 산정국민학교의 유명한 공산주의자 박선생의 시국강연이고 다른 하나는 같은 날 그 동네출신 전직 경찰관에 대한 인민재판이었다.

동네방죽 옆에 있는 너른 마당에서 박선생 강연이 먼저 열렸다. 한창 더울 때인데도 박선생은 검은 중절모에 검은 양복을 반듯이 차려입고 연신 손수건으로 이마의 땀을 닦으며 피를 토하듯 열정적인 강연을 했다.

‘영용한…영웅적인…위대한…쓸어버립시다…만세, 만만세…’
이런 단어들밖엔 기억이 없다.
그리고는 박수, 또 박수….

인민재판은 끔찍했다. 어린 나에겐 잘 이해안되는 논고, 동의, 동의의 함성이 지나고 죽창으로 처형을 할 차례인데 아무도 나서질 않는다. 피고의 얼굴은 백짓장 단계를 지나 송장모냥 시커멨다.

한 사람이 불쑥 앞에 나섰다.
술에 취한 것 같았다.
‘눈을 질끈 감고 요렇게만 하씨요, 죽창을 저놈 아랫뱃대기에다 요렇게 대놓고 눈을 질끈 감고 기합을 준단 말이씨! 요렇게! 야아아앗!’

나는 눈을 질끈 감고 내빼버렸다. 도망가는 내 뒷등어리에 갑자기 솟아난 네 개의 눈동자에는 모두들 눈을 질끈 감고 죽창을 피고의 아랫배에 갖다대고 ‘야아아앗!’ 기합을 넣고 힘을 주는 모습이 선명하게, 붉은 피 번지듯 선명하게 비쳐졌다. 그래서 나는 지금껏 인민재판의 실상을 꼭 눈으로 본것처럼 기억한다.

그것은 한마디로 천길 구덩이 속에서 솟아오른 도철의 얼굴들이었다. 사람은 이미 그 자리에 없었다.

실제로 본 것이 아니다.
나처럼 방상씨(方相氏)의 네 눈이 상상으로 본 것. 그것이 인민재판이다.
그것을 실제로 본 사람들은 다 죽었다. 혼이 죽어버린 것이다. 그것을 보고나서도 혼이 살아있는 사람은 이 세상에 아무도 없다.

그렇다.
그것은 죽임이 아니라 산자에 대한 검은 저주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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