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즈음은 라디오가 식은 밥이다.
그러나 그 무렵의 라디오는 신기(神器)였다.
어느날 저녁 무렵 소리없이 돌아온 아버지는 아무 말씀도 없이 그날부터 라디오 청취에만 몰두하셨다.
단파라디오.
미국에서 발신하는 한국의 소리 방송이나 기타 한국어 방송 등을 통해 미국과 동아시아 전체의 뉴스를 거의 다 들을 수 있었으니 아버지의 거동은 이상한 것일 수밖에 없었다. 자기 세상이 왔는데, 천지가 빨개졌는데 일체 시내 출입이나 동네 출입을 삼가고 집에만 칩거했으니 이상한 일일 수밖에 없었다.
훗날, 아주 아득한 훗날 알게 된 것이지만 당시 목포시당의 당성심사위원이라는 서슬푸른 지위에 있던 로선생에게 부탁해서 정세파악 임무라는 명분으로 현장의 일에서 떠나게 되었다는 것인데 과연 그런 판단을 내리고 로선생에게 칩거를 허용하도록 부탁할 만큼 할 어떤 사건이 있었던 것일까?
그러나 그것에 대해서 아버지는 끝끝내 함구령이었다.
언덕위 우리집의 여름날들.
아버지는 항상 집에 계셨고 간혹 시당이나 연동, 그러니까 북부지구당 간부들이나 인민군 장교들이 찾아오곤 했다.
한번은 이런 일이 있었다.
하당과 일로근처 과수원을 관리하는 인민군장교 한사람이 아주 복잡하게 고장난 라디오를 고쳐갔다. 그리고는 그 뒤 어느날 라디오 수선비로 달랑 배 두개를 가져온 적이 있다.
물론 그중 하나는 내가 먹었는데 그때 아버지는 왈
‘그사람 군대 나오기 전에 염전에서 일했을 것이다’
밤낮으로 공습이 심해졌다.
그냥 눈치지만 아버지의 단파라디오 뉴스가 심상치 않은가 보았다. 아마도 전쟁이 불리해지는 뉴스를 늘 듣고 계셨던 것 같다. 하루는 어머니더러 외가가 피해간 부줏머리로 날 데리고 피난하라는 말씀을 했다. 이유는 앞으로 공습이 더 심해진다는 것.
어머니와 나는 바로 그날 저녁 무렵 차남수 방죽과 일로를 지나 갓바위 호풍이네 과수원길을 지나가게 되었다.
노을 무렵의 과수원 숲길.
붉은 햇살에 빛나는 짙푸른 나뭇잎새들의 그 이 세상 빛깔 같지 않은 기이한, 기이한 그늘들! 그리고 그 아래 짙어지는 황토길의 우중충한 흙빛깔! 집을 돌아가며 우짖는 새들과 갓바위 바로 밑 물위에서 뛰어오르는 돌고래떼 위에 번득이는 저녁햇살, 멀리 벽돌섬 붉은 기슭너머로 푸르른 영암 월출산맥. 흰 돛단배들.
갓바위에서 소풍하던 소중한 기억들을 떠올리며 어머니와 나는 바삐 숲을 지나고 마당도 지나 첫 별이 돋을 무렵엔 하당 뚝도 지나서 부엉산 밑에 이르렀다. 부줏머리 입구가 보이고 그 건너 둥구섬의 검은 모습이 요요히 물위에 떠있었다.
부줏머리!
나의 맨 첫 번 시로 알려진 ‘황톳길’의 배경이다. 영산강가의 작은 마을.
바로 이웃한 오감리가 경찰관 몇 사람이 출신해서 우익동네로 점찍힌데 비해 부줏머리는 공산당에 몇 친척 연줄이 있어 좌익동네로 꼽혔었다. 실제로 두 동네사이에 보복극이 있었다곤 하나 언젠가 한번 오감리 입구의 감나무 밑에 갓난아기 송장이 가마니에서 삐죽이 나와있는 것을 보았고, 부줏머리 갯가에서 또 가마니 덮인 송장을 본 것 외에 부줏머리 학살극을 직접 본적은 없다. 그러나 어른들은 쉬쉬하면서도 두 동네가 철천지 원수지간이란 말을 터놓고 하는 것을 여러번 들었다.
산천에도 역사가 있다.
인간의 피비린 비극이 있어온 산천, 그리고 있게된 산천은 다른 산천과 달리 음산한 기운이 가득 서리는 법이다. 풍수는 묫자리나 찾는 유복한 사람들의 호사스런 것만은 아니다. 인간과 자연을 일치시켜 파악하는 초생태학(超生態學)으로 거듭나야 할 기막히게 효력성 있고 놀랍도록 심오한 학문이 곧 풍수학인 것이다.
물론 나는 풍수를 아는 것은 아니다. 그리고 그때 나는 어린애였다.
그러나 뭐라할까?
그저 단순한 기감(氣感)이라 할까?
어둑어둑한 초저녁 땅거미 속에서 드러나는 부엉산과 부줏머리 입구의 밭길과 검은 둥구섬, 그리고 검푸른 영산강과 머언 영암 월출산의 시커먼 그림자를 처음 바라보는 내 마음에 어떤 스산함이, 기괴한 불길함이 가득찼던 것을 지금도 기억한다.
마치 에드가 알란 포의 어느 작품에서처럼 산천자체가 비극으로 느껴지던 것은 아니었을까? 이 첫느낌의 연장선위에 나의 시 ‘황톳길’의 이미지 체계가 서있다.
죽음과 반역의 땅, 부줏머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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