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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지하 회고록 '나의 회상, 모로 누운 돌부처' <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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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지하 회고록 '나의 회상, 모로 누운 돌부처' <48>

영채형

나를 사랑했고 내가 사랑했던 아름다운 사람 영채형.
나는 영채형의 흰 이미와 꿈꾸는 듯한 검고 깊은 눈동자, 그리고 그 그늘져 서글한 목소리와 미소를 사랑했다. 바로 윗집 사는 승철이 외삼촌인데 목수다.

나에게 나무결의 신비로운 아름다움을 깨우쳐준 것도, 나무 중에서도 제일 귀한데는 뿌리이며 뿌리를 재목으로 만든 목공예품이 가장 품위있고 향기롭고 귀중하다는 것도, 나무는 죽어서도 생성을 계속한다는 것까지도, 이 모든 비밀을 가르쳐준 이는 바로 영채형이다.

영채형은 한때, 우리가 참으로 행복했던 때 구산동 제3수원지 벚꽃 동산에 놀러갔을 때에도 내 손을 붙잡고 일일이 벚꽃 나무의 종류와 이제는 다 잊었지만 그 생리들을 가르쳐주었다.

그 형은 달이 떴을 때는 윗집에서, 자기 목수 방에서 살며시 내려와 나를 데리고 뻘바탕에 있는 원뚝 내수면으로 물에 비친 달구경을 갔었고, 문저리 철에는 왕자회사 앞 수로에 데리고 가 낚시를 가르쳤다.

뻘바탕에서 갯당근을 뽑아 갯물에 씻어 씹어먹으며 형이 내게 한 말이 있다.
‘영일아 니는 커서 멋이 될라냐?’
‘나는, 나는…… 저…’
‘니는 멋이 될라는 생각은 하지마라’
‘으째서라우?’
‘좋은 사람이 되겠다는 생각만 해!’
‘그래, 그것이 제일이여!’

영채형은 공산주의자는 아니었다. 그러나 옆에서들 자꾸 내밀어서 연동 민청간부가 됐었다.
그리고 기억난다.

그날
국군 수복 후 형사와 방첩대원이 우리집을 덮쳤을 때 우리집 구석방 부엌 아궁이에 숨어있다 잡혀간 뒤 이 지상에서 떠났다. 강제로 국군에 징집당해 전선에 나갔다가 총에 맞아 떠났다. 영원히 떠났다.

그 아름다운 젊은 사람은 참으로 허망하게 이 세상을 떠나버리고 말았다.

최근 일본에 세 번 가서 세 번이나 만난 한 아름다운 청년이 있다. 교오또의 해맑은 크리스챤 청년 다까하시 다다시(高橋正)! 혹시 영채형의 부활 아닐까? 그렇게 쏙 빼닮았다. 내개 주문하는 내용도 비슷했으니 이상하고 이상한 일이다.

***뚜갱이**

6.25하면 유난히 짙게 기억되는 이가 바로 뚜갱이다.
성도 이름도 없이 그저 뚜갱이였다. 참으로 기본중의 기본계급 출신이다. 공산주의자가 되기 전까지 그저 종에 불과했다. 동네종! 동네머슴!

대한민국에서 가장 가난하고 천대받은 곳이 전라남도, 그중에도 가장 가난하고 천대받은 곳이 목포, 그중에도 가장 가난하고 천대받은 곳이 연동, 연동 중에도 뻘바탕, 뻘바탕 사람 중에도 가장가장 가난하고 제일제일 천대받은 사람이 바로 뚜갱이였다.

낳아놓기만 하고 버리고 달아나 부모도 없고 피붙이조차 일체 없는 뚜갱이. 친구도 어울리는 친구 한사람도 없는 동네머슴 뚜갱이.

그 뚜갱이에게 의식과 자존심을 넣어준 아버지에게 지금 이 글을 쓰면서 무한한 박수를 보낸다. 박수라니 좀 건방지지만 아버지의 착안과 결심이 놀라워서다.

그 뚜갱이는 당과 조직에서, 그리고 아버지가 시키는 일이라면 그야말로 물불을 가리지 않았고 밤낮없이 헐레벌떡 뛰어 돌아다니면서도 늘 벌쭉벌쭉 만족의 웃음을 웃었다.

기억난다.
뚜갱이가 비행기에서 살포하는 선전삐라를 일일이 주우러 다니면서, 남의 집 안채에까지 그억그억 들어가 삐라를 찾아내 빼앗아 오면서 꼬박 꼬박 한 말이 있다고 한다.
‘살기좋은 세상 만들라고 이라요’
살기좋은 세상!

그렇다.
저 혼자 복수심을 채우거나 자존심을 살리고 프롤레타리아 우선주의에 빠져서가 아니라는 뜻이다. 그저 건성으로 지나칠 수 있는 이 이야기를 가만히 두 번 세 번 되풀이 곱씹어보면 결국은 또다시 시몬느 베이유에 가 닿는다.
‘천민(賤民)이 가장 성자(聖者)답다’

그 뚜갱이도 국군 수복 때 월출산 입산에도 끼지 못한 채 경찰에게 총살당해 죽었다.

그것으로 끝이다.
그 뒤 아무도 뚜갱이를 기억하는 사람은 없었고, 아버지조차도 그를 기억하지 않았다.

그런데 왜 내가 그를 유난히 기억할까? 그는 대진이 삼춘 이래 두 번째로 나를 무등 태워준 사람이기 때문이고, 아무런 사설이나 가식도 없는, 그저 은인의 아들로서, 동네 동생으로서 사랑스런 마음 하나로 만날 때마다 무등을 태워주었기 때문일 것이다.

무등!
내가 군신의 이미지같은 국방경비대 대진이 삼춘을 기억하듯이 그 천민(賤民) 공산주의자 뚜갱이를 기억하는 것이 바로 무등 때문이라면 어린이의 사랑에 대해 무등이란 무엇일까?

한걸음 더 나아가자.
‘어린 사상’
좌우를 함께 넘어서려는 새 사상의 유년(幼年)에 있어 무등! 그 스킨십의 일종이라 할 수 있는 무등은 대체 무엇일까? 참으로 무슨 관계를 갖는 것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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