많은 사람들이 잡혀갔다.
솔개재 오동나무거리 교화소는 반동분자로 가득찼다. 연동 뻘바탕 가난뱅이 동네에서는 잡혀간 사람이 별로 없었지만 내 주변엔 그러나 변화의 바람이 불었다.
문태 숙부가 반동부화분자(反動浮化分子) 즉 인민을 괴롭히는 깡패로 몰려 잡혀가 오동나무 거리에 갇혔고 외할아버지와 큰 외삼촌이 반동으로 몰릴까 두려워 영산강가 부줏머리로 피신했다. 그리고 목포 중학교 학도호국단장을 하던 큰고모의 아들 태환형이 무안시골로 깊이 몸을 감췄다.
여기저기서 인민재판이 시작되고 돌과 죽창으로 사람을 때려죽이고 찔러죽이는 증오와 원한의 피투성이 보복이 되풀이되었다.
밤낮으로 폭격이었다.
고무 공장이었던 영산강가의 거대한 왕자회사를 폭격하기 위해 산정 동쪽에서부터 저공비행해 야차 같은 굉음과 함께 넘어오는 폭격기 바람에 머리가 날라가버릴 듯한 충격을 몇차례 받은 뒤로는 의례껏 저공비행하는 비행기의 조종석까지 훔쳐볼 정도로 나는 담대해졌는데 그때마다 친가와 외가 사람들의 태도에 웃음이 나오곤 했다.
어머니와 이모들은 비행기만 나타났다하면 대낮에도 구석에 포개둔 이불속에 머리만 틀어박고 온몸은 훤히 드러낸 채로 덜덜덜 떠는데에 똑같았고, 꿩이 그렇다던가, 큰집에선 반대로 옥살이 할아버지가 마당까지 일부러 나와 비행기를 쳐다보며 마치 비행기 조종사가 들을 수 있기라도 하듯이 주먹을 휘두르며 ‘쾅쾅 때려부셔라! 쾅쾅 때려부셔라!’ 소리소리 지르셨다. 사랑하는 문태 숙부가 잡혀가 숱한 고생을 하고 있기 때문이었다.
폭격이 있는 날 밤의 그 환하고 찬란한 밤하늘, 그리고 그 빛속의 찬란한 유희! 수십개의 조명탄이 떠있는 밤의 오로라 속에서 우리는, 그렇다! 중학교 일이학년에서 초등학교 삼사학년까지의 연동 뻘바탕의 ‘아그들’ 패거리, 그러니까 우리 대장 만열이의 이름을 따 ‘만열네’로 불리던 열명 안팎의 악동들(?), 바로 그 우리가 그 빛 바람에 왕자회사 그 큰 공장 건물 안에까지 들어가 둥그렇게 앉아서 위태위태한 시국회의까지 개최했었으니…
그 회의에선 쉬쉬하며 보안을 당부하면서도 실제로는 노골적으로 반동적인 발언에서 친공적인 발언까지 서슴없이 했었으니… 우리 자신의 눈으로 보건데 트릿하면 트릿하다, 좋으면 좋다라고 우리 스타일의 인민재판을 서슴없이 해댔으니… 가희 유희삼매(遊戱三昧)였다!
훗날 질 들뢰즈를 읽으며, 역사에서 시작되고 역사로 돌아갈 운명이지만, 그 자체로서는 역사가 아니고 역사와는 반대되기조차 한 민중의 카오스적 내면성과 삶의 소망으로서의 생성에 대해 말할 때, 또 해월 최시형 선생의 향아설위(向我設位) 법설을 감옥 안에서 읽으며 근본적인 자기회귀적 시간관에 관해서 생각하면서 탈춤과 시나위판의 열두거리, 그 율리시즈적 시간을 떠올렸을 때, 그리고 미셸 셰르의 비선적(非線的), 역류적(逆流的) 시간에 관해 읽을 때, 그때마다 내 가슴에 꽉차오르던 눈물이 애당초 바로 이때의 그 유희삼매에 선을 대고 있음을 이제 깨닫는다.
이 유희삼매의 반대편에 한 소년의 역사가 버티고 서 있으니 바로 학교와 소년단이 그것이었다.
***학교**
하늘에서는 미군 비행기가 설쳐댔고 땅에서도 나무그늘에서는 인민군이 깝쳤다.
우리 학교는 인민군에게 점령되었으나 교실안엔 인민군이 없었고 인민군과 차량들은 모두 나무그늘에 쉬고 있었고 숲 그늘에서 잠잤다.
학교에 나가면 친공적 교사들의 지휘통솔 하에 학교 운동장을 빙빙 돌며 행군하는 것이 다였다. 그때마다 노래를 불렀는데 기억나는 것은 ‘장백산 줄기줄기 피어린 자욱’ 이란 김일성 노래와 학교교사 정면에 붙여놓은 거대한 김일성 초상과 스탈린 초상이다. 새파랗게 젊은 김일성을 원수님이라 부르는 것도 이상했지만 코쟁이 스탈린을 대원수님이라고 부르라 하는건 더욱 이상했다.
교사 안엔 들어갈 수가 없었고 운동장 이외엔 못가게 했다. 나의 소감(小龕)엔 간지 오래되었지만, 참으로 이상한 것은 내가 왠지 신이 나서 ‘만열대’ 패거리와 돌아다니느라 외롭고 서러운 일이 별로 없었다는 점이다.
가난하고 외로운 사람들, 그리고 아이들과 불행한 이들에겐 전쟁이나 천재지변이 기이하게도 축제처럼 다가오는 이유를 지금도 모르겠다.
가끔 오대현 선생님의 모습이 잠깐 보이기도 했고 우리학교의 유명한 공산주의자인 박선생이 땀을 닦으며 교장실로 바삐 들어가는 것을 몇 번 보았을 뿐이다.
기억에 생생히 남는 학교의 모습은 인민군이 누워 잠든 그 큰 나무그늘들 뿐이다. 말없는, 그러나 할말이 많을 듯한, 그리고 우리들 애갱치들의 저 가공할 부역사실을 모두 다 환히 알고 있을, 그래서 언제든 우리를 목조를 수 있는… 허허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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