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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지하 회고록 '나의 회상, 모로 누운 돌부처' <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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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지하 회고록 '나의 회상, 모로 누운 돌부처' <45>

깃발

인민군 들어오던 날 아침 연동에서다.
나는 친구들과 함께 다리뚝이 보이는 신작로에 나가 있었다. 누군가 내 옆구리를 쿡 찌르며
‘느그 아부지 온다’ 했다.

바라보니 목포시내 방향의 길 저쪽에서 흰 와이셔츠에 검은 바지를 차려입은 아버지가 동네 청년들로 하여금 거대한 깃발을 네 귀퉁이에서 각각 붙들게 하고 우리들 앞을 지나 또닥-또닥- 일로(一老)쪽으로 다리뚝을 넘어 행진해 나가고 있었다.

누군가 그 큰 깃발을 두고
‘저것이 멋이라냐?’
했다.
또 누군가가 의기양양해서
‘저것이 인공기란 것이여!’
했다.

그래. 그것이 인공기(人共旗) 였다.
처음 보는 인공기!
푸르고 붉고 별 하나에 줄 두개.
내 눈엔 태극기도 복잡하지만 인공기는 더 복잡해 보였다. 무슨 뜻일까?

흰 와이셔츠에 검은 바지를 차려입은 아버지의 모습이 저만치 멀어져가고 있었다. 생소한, 평소엔 보지 못하던 아버지의 모습. 얼굴도 달리 보였다. 그 이상한 느낌. 무엇을 뜻하는 것일까?

조금있다 하늘에 비행기가 한대 나타났다. 정찰기였다. 천천히 날고 있었다. 기총소사도 폭격도 하지 않았다. 무엇을 하는 것일까?

정찰기가 사라지자 이윽고 다리뚝 너머로 사이드카, 그래, 나중에야 알게되었지만, 그때 그 이상하게 생긴 사이드카가 역시 이상한 복장을 한 인민군을 싣고 들어오기 시작했다. 노랑색과 갈색 중간의 초록색 군복위에 시뻘겋고 또 샛노란 계급장을 단 인민군들이 뒤를 이어 계속 행진해 들어오고 있었다. 이름을 알 수 없는 별의별 무기가 다 있었는데 그중에도 제일 이상한 것이 납작하고 짤막한 포신을 가진 산포(山砲). 산포가 제일 우스웠다. 저렇게 짧은 포신을 가지고 어떻게 포탄을 멀리 날려보낼 수 있을까? 나의 의문은 끝이 없었다.

더욱 이상한 것은 소와 말, 그리고 달구지와 마차 등으로 이루어진 군대행렬이었다. 당시의 전쟁을 모르는 내겐 군대 같질 않고 똑 무슨 산적떼 같은 느낌이었다. 만화에서 보던 삐까번쩍하는 금속으로 가득찬 미국 군대와는 아주 달랐다. 그중에도 가장 이상했던 것은 웬 텁석부리 군인 하나가 인공기를 망토처럼 등에 휘감고 말을 탄채 행진해 가는 것이었다. 깃발을 등에 휘감고 다닌다? 무슨 뜻일까?

나는 친구들과 함께 인민군 행렬을 조금씩 조금씩 뒤따라 결국엔 목포시내까지 들어가고 말았다.

목포 경찰서 앞.
한 인민군이 따콩총을 들고 지키고 서있는데 나이가 열 대여섯살쯤 될까? 자그마한 키에 보송보송 어린 얼굴로 키큰 따콩총을 앞에들고 땀을 뻘뻘 흘리고 있다가 구경꾼들이 좁혀 들어오자 총부리를 겨누며 소리를 꽥 질렀다.
‘야! 이 간나새끼들! 저리 가지 못하간?’
따콩-
드디어 공포까지 쏘았다.
따콩-
또 쏘았다.
나와 친구들은 총바람에 그만 혼비백산해서 달아나 연동으로 내쳐 돌아오고 말았다. 총까지 쏘다니 무슨 까닭이었을까?

그날 저녁
‘호줏기’라 불렸던 제트기 편대가 날아와 목포역과 선창, 미창 창고와 기관고에 대대적인 기총소사를 해댔다.

연동 사람들은 모두들 집에서 나와 뻘바탕에 가 엎드렸고 어머니와 나도 그곳에 가 엎드렸는데, 엎드려서 치어다보니 아버지는 우리집이 있는 목포시내 방향의 흙언덕 높은 곳에 올라가 두 손을 옆구리에 짚고서서 비행기들을 쳐다보고 있었다. 무슨 철학자나 과학자 같았다. 무엇을 생각하는 것일까?

뚜렷이 기억에 떠오르는 것은 저 유명한 기본중의 기본 출신인 뚜갱이가 아버지 주변을 위성처럼 빙빙돌며 호위하고 있는 모습이다.

두 사람은 노을을 받으며 내내 거기 서 있다가 태양과 함께 내 눈으로부터 사라졌다.
사라졌다!
그 뒤 한참동안 나는 아버지를 보지 못했다. 어딘가 다녀오신게 분명하다. 어딜까?

그날.
그리고 뒤이어 그 며칠동안 모든 것이 의문투성이였다. 그저 바라만보고 하라는대로 따라만 하는 날들이 시작되었다.

머언 산정리 검은 산 그림자 위를 붉고 푸른 불빛들이 탄환처럼 불연속적으로 지나가며 ‘쓰쓰또또-쓰쓰또또’ 신호음을 내고 시커먼 다리뚝 밑에서 시뻘건 관을 지고 웬 남자가 피투성이로 꺼꾸러졌다 일어섰다 하며 그 자리에서 허우적거리는 환영이 꿈인지 생시인지 분간이 안되는 중에 거듭거듭 내 시야에 출몰하던 날들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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