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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지하 회고록 '나의 회상, 모로 누운 돌부처' <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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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지하 회고록 '나의 회상, 모로 누운 돌부처' <44>

불빛

그날 밤.
높은 언덕위에 있던 우리집 토담너머로 머언 일로의 비녀산 아래 캄캄한 밤속을 천천히 움직이는 불빛이 있었다. 멈췄다 움직이고 또 멈췄다 천천히 다시 움직이고 불빛이 음산한 운명처럼 이쪽을 향하여 다가오고 있는 것을 우리는 담너머로 내내 지켜보고 있었다.

캄캄한 대륙으로부터, 그리고 서울쪽으로부터 거대한 파멸이 서서히 다가오고 있었다. 그때는 알 수 없었으나, 그것은 분명 내 삶의 지도를 바꾸고 내 생애의 소망과 내면성의 생성의 시간을 역사의 이름 아래 왜곡, 굴절시킨 파멸의 시작이었다.

누군들 그 파멸로부터 자유로웠을 것인가?
한반도에 사는 자, 그 누구도 그로부터 자유로운 자는 없었을 것이다. 불빛은 산으로부터 내리는 귀신불 같기도 하고 어둠 자체로부터 배어나오는 도깨비 불 같기도 했다. 그것은 분명 시퍼런 빛깔이었다.

시퍼런 귀신의 눈!
그것은 멀미나는 저 표랑의 시절, 부평이었던가 캄캄한 어느 골목 저 먼 끝에 명멸하던 괴괴한 불빛, 그것이었다.

나는 본능적인 두려움에 떨고 있었다. 떨면서 불빛을 내내 지켜보고 있었다. 이 두려움을 깨트리고 유년의 장난끼로 나를 돌려 세운 것은 재호삼춘이었다.

‘아야! 영일아!
저기 저 솔개산 성기당(聖技堂)에 멋이 있는줄 아냐? 맛있는 서양과자에 비단옷에 으리의리한 보석에다 왼갖 장난감이 그득그득이여! 안갈래? 가지러 안갈래? 코쟁이들이 지금은 다 도망가고 아무도 없당께!’

끝내 나는 가지 않았다.
그러나 내 마음만은, 내 유년의 장난끼 많은 마음만은 재호삼춘을 따라 솔개산에 올라간 동네 청년들과 함께 갔다.

인공치하에서 연동 뻘바탕에는 난데없는 울긋불긋한 서양옷들이 여기저기 나돌아다니고 서양물건들이며 서양 약품등속이 이집 저집에 퍼졌으니 이것들이 모두 그날 밤 재호삼춘 패거리가 훔쳐온 것들이다.

내가 그 무렵 내내 가지고 놀던 커다란 가죽망치가 하나 있었는데 이것 역시 그때 물건으로 솟증 솟은 재호삼춘이 어느날 푹 삶아 도가니를 만들어서 초고추장에 뚝뚝 찍어먹은 사건이 일어날 때까지는 내내 가지고 놀던 그 누우런 가죽 망치 말이다.

***만세**

인민군 들어오기 바로 전날 저녁이다. 연동 산정식당 앞 신작로를 흙먼지를 가득 일으키며 일로쪽으로 달려가는 해군 쓰리쿼터 한대가 있었다.

기관포를 앞세우고 썬글라스를 낀 푸른 작업복의 수병들이 멋진 폼으로 내달리고 있었다. 시위였다. 그런데 내 친구 병헌이는 이 감격적인 시위에 그야말로 크게 감격하여 난데없이 두 손을 번쩍 치켜들고 만세를 불렀다.
‘대한민국 해군 만세에-!’

우스운 일이다.
왜냐하면 바로 그 다음날 오후에 인민군들이 산포(山砲)와 야포(野砲)를 앞세우고 진주할 때도 병헌이는 똑같은 몸짓으로
‘인민군 만세에-!’를 연거푸 크게 불렀으니 말이다.

슬픈 일이다.
왜냐하면 6.25전쟁 3년 내내 국군과 인민군이 번갈아 진주할 때마다 이 만세 저 만세를 영악스럽게 갈라 부르다가 깜빡 착각하여 만세를 거꾸로 불러 직석에서 총맞아 죽은 사람이 부지기수였으니 말이다.

민중이여!
이런 사람들이 다름아닌 민중이었으니 참으로 우습고도 슬픈 일이다.
지식인 나부랭이들 어느 누가 무어라 개거품 물고 떠들더라도 전쟁은 민중을 위한 것이 결코 아니며 민중의 삶을 말할 수 없이 황폐화시키는 바로 민중의 원수였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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