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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지하 회고록 '나의 회상, 모로 누운 돌부처' <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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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지하 회고록 '나의 회상, 모로 누운 돌부처' <42>

우리집

아버지는 드디어 집을 짓기 시작했다. 우리집, 우리집, 간절한 소원이던 우리집. 평생 그 후로 가져본 적이 없는 단 한번뿐이었던 우리집.

왕자회사와 영산강이 환히 내다보이는 산어덩이었다. 방 두 칸, 부엌 두 칸, 기역자 마루에 동남향(東南向)으로 아담한 일자 기와집. 마루 뒷벽에 문을 내 바람길을 터서 시원하기 그지없었다. 앞뒤 양옆으로 낮은 토담을 쳤고 토담 위엔 새끼 기와를 얹었다. 앞마당에 흙을 일궈 채마밭을 만들고 상추와 쑥갓, 둥근 양무를 심었다. 채마밭 귀퉁이엔 석류나무와 여자나무를 심고 대발로 집을 지어놓았다. 어머니는 쉴새없이 크고 작은 항아리에 밑반찬이며 젓갈마련을 하셨고 아버지는 매일같이 올망졸망한 세간을 사 나르셨다. 그리고 또 나를 위해 사 나르셨다.

아, 그 온갖 화구며 장난감 연장이며 아름다운 그림책들! 화란의 풍차와 튤립과 행주치마 두른 꼬마 아가씨들, 하와이의 푸른 파도타기의 멋진 그림들! 섬세한 날개 그물만 남은 수십종의 꿈결같은 색색의 나비를 끼워둔 사향내 나는 그 채집본들. 수백 종의 식물채집본, 내 키만큼 쌓인 심포니 앨범, 짠짠 바라바라 수동식 영사기, 온갖 등산장비들과 수없는 등산기념 사진첩, 은은한 스탠드 불빛, 흰 레이스 커튼, 오붓한 밥상머리, 편안한 잠자리, 그치지 않는 웃음소리, 행복했다.

나는 드디어 완전한 안정을 찾았고 마침내 세계와 화해했다. 그 무렵 예쁜 작은고모 선보던 사건이 기억난다.

상대는 해군 일등 수병이었는데 그날 우리집에서 저녁을 대접하기로 했다. 집 자랑할 의도도 있었던 것 같다. 집에서는 음식준비를 하고 고모와 나는 초대연락을 하기 위해 째보선창 옆 해군 삼바시 뒤쪽 다순구미 높은 산꼭대기에 있는 병영 근처로 갔다. 병영이 보이는 산등성이 한 자그마한 고모친구 집이었다. 마당의 손바닥만한 화단 위에 꽃들이 만발해 있었고 낮은 돌담 너머로 푸른 바다, 그 너머 용당 반도가 훤히 보이는 곳이었다.

건너편 산위 병영에서 뛰뛰떼떼 나팔소리가 울리며 푸른 작업복의 수병들이 이리 뛰고 저리 뛰는 모습이 보였다. 고모와 그 집주인은 방 안에서 연신 까르르 까르르 웃어대며 이야기 하고 있었다.

그때 나보다 더 조그마한 한 아이가 뒤곁에서 나와 내게로 슬슬 다가왔다. 다리를 심하게 절고 있었는데 허약한 몸, 노오란 얼굴에 두 눈만 새카맣고 번들번들 커다란 아이였다. 멈춰서서 나를 한참 노려보더니 대뜸

“얘!”
서울 말씨였다. 나는 순간 움찔했다.
“얘! 너 바다 밑에서 사는 새 봤니?”
나는 대답대신 고개만 가로저었다.
“병신! 나는 매일밤 본다. 밤에 말이야. 저기 저 바다에 하얀 파도가 생기면 말이지, 나와 하늘로 날아간다구. 날개가 새빨갛고 눈이 새파란게 세 개가 달리구, 발은 열 개야 열 개. 노오란 발이 열 개!”

나는 가슴에 무언가 어둡고 참혹한 그늘이 스며드는 걸 느끼며 한 번 몸을 부르르 떨었다.
“얘! 너 바다우는 소리 들어봤니? 바다가 어떻게 우는지 아니?”

나는 몸이 얼어붙기 시작했다. 웃었다. 그애가 순간 헤헤 웃었는데 똑 진구렁 바가지 늙은이 같았다.

“이렇게 울어, 봐! 어허야 어허어야 어와넘차 어허어야”
상여소리를 내고 있었다. 그러다 느닷없이 소리를 꽥 질렀다.
“바다에 송장이 꽉 들어찼어!”

나는 완전히 질려 버렸다. 어떻게 그 집을 나왔는지 모르겠다. 자꾸만 발을 헛딛어 넘어지면서. 지금까지도 그 아이의 어둡고 기괴한 영상이 지워지질 않는다.

그날 노을 무렵. 산정식당 앞 신작로에 나와 기다리고 있던 나는 쌔하얀 정장을 차려입은 참으로 미끈하게 잘생긴 젊은 수병을 만나 집으로 데려갔다. 어둠이 내리는 그 저녁 그 단란한 식사가 내내 잊혀지지 않는다. 허나 단란함 때문이 아니다. 이상하게 내려 쌓이기 시작하던 그 운명같은 그날 땅거미가, 그리고 그 외로운 스탠드 불빛이….

6.25가 다가오고 있었다.

***방송**

그 날.
일요일, 나는 외가에 있었다. 외가의 차갑고 시원한 대청마루가 생각난다. 그 마루위에 여럿이 모여앉아 참외를 깎아먹고 있었다. 먼 친척되는 한 젊은 군인이 외출 나와서 놀러와 있었다.

안방에 있는 라디오로부터 문득 삼팔선에서 남과 북 사이에 교전이 있었다는 것과 휴가나 외출나간 군인들은 즉시 본대로 귀대하라는 방송이 흘러나왔다. 친척 군인이 벌떡 일어나 옷깃을 여미고 돌아가겠다며 거수경례를 붙였다. 침묵이 뒤따랐다.

날카롭게 기억되는 것은 그때의 그 차갑고 시원한 대청마루의 감각이다.

6월 25일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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