군산동 제3 수원지의 눈부신 벚꽃구름. 동네 야유회였다. 그날 나의 삶은 빛나는 꽃잎과 꽃잎 사이 친척과 이웃들의 꽃피듯 함뿍 웃음담은 눈빛과 눈빛 사이에서 섬세하게 떨리는 티없이 맑고 화사하고 드높은 기쁨에 넘친 한 소절의 노래같은 것이었다. 맨발에 밟히는 꽃잎의 한없는 부드러움. 내 손을 잡고있던 영채 형, 그 흰 이마 위에서 살랑거리던 꽃그늘, 여기저기서 터져나오는 내 사랑하는 사람들의 밝은 웃음떨기들.
나는 낙원 한복판에 있었다. 짧은 한순간의 찬란한 절정만 남고 가고 오던 길 모두 까맣게 기억에서 사라져 버렸으니 아름다움과 행복은 그 자체로서 완벽하게 고립된 실재인가. 내 생애에도 이처럼 눈부신 순간이 분명 있었음을 생각하니 그다지 실패한 인생이 아닌 듯 싶기도 하다.
갓바위에서의 여름날 소풍이 이어 생각난다. 바위 밑 푸른 물 위를 연이어 뛰쳐오르는 돌고래. 녹음 우거진 호풍이네 과수원의 그 예감에 가득찬 숲그늘. 빛나는 태양. 시뻘겋게 타오르는 벽돌섬의 황토빛, 잔잔한 강물. 아슴프레 먼 곳 월출산의 푸른 연맥들. 흰 돛단배들.
그날 바위 위에서 웬 낯선 사람이 술에 만취해 병을 깨서 자기 팔을 마구 찌르고 피투성이가 된 채로 뭐라 울부짖고 있었다. 아마 여자 때문이었나 보다. 아무도 돌보는 사람이 없었다. 미친 사람 취급이었다. 그런데 그때의 아버지, 입고 있던 흰 와이셔츠를 서슴없이 주욱죽 찢어 그 사람 팔에 감아주고는 어깨를 끌어안고 끝없이 달래던 아버지의 그날 그 모습, 참 자랑스러웠다.
익살스런 소풍도 있었다.
어느 일요일 아침인데 아버지가 가게문을 닫으며 느닷없이
“오늘 꺼먹바우 놀러가자”
꺼먹바우란 데가 황량한 벌판 한가운데 못생긴 시커먼 바위 하나만 우뚝 솟아 볼 것이라곤 도무지 없는 곳인데 왜 갑자기 거길 놀러가자는지 알 수 없었다. 일행은 아버지와 나외에 작은 숙부와 재호삼춘 그리고 성진이 아저씨, 이렇게 다섯 사람이었다.
어머니가 주먹밥 보따리를 건네며 웬일인지 우리 부자 몫과 세 사람 몫을 따로 챙겨주었다. 촉빠른 재호삼춘이 매눈을 반짝.
“요상하네, 으째 따로따로 갈르요?”
내 보기에도 이상했다. 한데 어머니는 아무 말씀없이 그저 웃기만 했다. 아버지도 덩달아 웃었다. 아무래도 뭔가 수상쩍었다.
좁은 꺼먹바우 위에 다섯 사람이 몽땅 올라가 앉아 이런저런 이야기를 하며 싱겁게 시간을 보내다가 점심을 먹게 되었다. 주먹밥 안에 다진 쇠고기가 들어있어 아주 맛있게 먹었다. 돌아오는 길에 재호삼춘.
“하아따, 그놈의 명태볶은 것 안에 까시가 있어 갖고 입천장에 박혀 혼났네 잉-”
내가 엉겁결에
“내 밥에는 소고기가 들어 있던디!”
“머? 머라고야?”
재호삼춘 매눈이 화들짝 열리고 잇따라 터져나온 아버지 너털웃음이 한없이 이어졌다. 소풍이 목적이 아니라 장난이 목적이었다. 그뒤로부턴 재호삼춘, 어머니 얼굴만 보면 외느니 그저 그무렵의 황금심이 노래 한 구절,
괄세를 마오, 괄세를 마오
괄세를 마알아아요오-
목포상업학교 운동장은 중앙의 그라운드만 빼고는 마치 초원처럼 한없이 넓은 잔디밭으로 유명하다. 꿈에도 잊을 수 없는 그날. 그 일요일 정오. 하늘에는 흰 조개구름이 얇게 깔려 있었고 바람은 산산한 미풍이었다. 인적없는 푸른 잔디밭에 아버지와 나는 자그마한 2인용 텐트를 쳤다. 몇 미터 앞에 빨간 깃대를 꽂고 나는 거기서 소형 글라이더를 날렸다. 허공을 나는 글라이더의 흰 몸체와 뒷날개의 새빨간 빛깔의 대조가 내 눈에 선연히 남아 있다. 몇 차례고 몇 차례고 날렸다. 비상할 때보다는 푸른 풀 위를 미끄러지듯 살풋 앉는 착륙할 때의 사뿐한 모습이 더 멋있었다.
아버지는 내게 그날 바람에 대해서, 글라이더의 성질에 대해서, 그리고 텐트와 등산에 대해서 여러 가지를 말해주셨다. 버너에 밥을 지어먹고 나서 뺨을 간질이는 미풍 속에 열어제친 텐트에 누워 우리는 몇 시간이고 깊은 잠을 잤다. 그때 무슨 꿈을 꾸었을까. 그날은 내게 결코 잊을 수 없는 날, 내가 아버지의 사랑을 확인한, 그것도 화창한 날 드넓은 초원에서 멋진 친교 속에 확인한 참으로 행복한 날이었다.
어느 날 노을 무렵이었다.
아버지는 서서 앰프를 수리하고 계셨고 나는 방 문턱에 걸터 앉아 빌려온 만화를 보고 있었다. 그 때 커다란 캡을 눌러쓰고 커다란 탱크바지에 낡은 두단추 양복을 위에 걸친 한 늙수그레한 사나이가 문 앞에 와 우뚝 섰다.
“이봐, 맹모”
아버지가 힐끗 쳐다보더니 얼굴을 잔뜩 찌푸린 채 시선을 그대로 거두어 앰프에 고정시켜버리고 만다.
그 사람은 도대체 누구였을까,
황량한, 황량한 그 늙은 얼굴!
아버지를 수시로 감찰하는 담당형사! 보도연맹 지도경찰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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