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홉 살이 되었다. 3학년. 내겐 좋은 일만, 지금 기억하기에도 싱그레 웃음 배어날 그런 일만 거듭 있었다.
궂은 일 뒤엔 반드시 좋은 일이, 더 궂은 세월 오기 전엔 으레 한 번쯤은 오붓한 시절이 있는 법인가. 아홉 살에서 열 살 초여름, 6.25동란 나기 직전 무렵까지가 아마도 내 평생 단 한 번 행복한 시절이었나 보다.
그 시절을 회상할 땐 늘 떠오르는 노래 하나가 있다. 좀 엉뚱하긴 하지만 마하리아 잭슨의 ‘여름 한철’.
여름 한철 삶은 편안해
물고기는 뛰어 오르고 목화는 높이 자라
네 아빠 넉넉하고 네 엄마 얼굴 좋아
엄마 아빠 너를 기다려
문간에 저기 서 있네
뒷부분은 정확하지 않다. 하나 상관있나. 나는 그렇게 고쳐 부르며 늘 나의 그때를 회상하곤 했으니까. 회상하면서 속으로 울곤 했으니까.
그때 아버지는 남로당 불법화와 대거월북, 그리고 빨치산에 대한 대평정 이후 무더기 전향과 보도연맹으로 좌익세력에 모두 묶여 생활안정을 되찾았을 때, 보도연맹에 들어가 산정국민학교 고갯마루, 산정식당 옆 신작로 가에 자그마한 전파상을 차렸고 우리는 그 가게 바로 옆방에 세들어 살았다. 그 방은 아주 비좁고 작았는데도 늘 화안한 빛이 들어 퍽 정갈하고 편안했다. 가게로 열린 방문턱에 턱을 고이고 앉아 분주하게 연장을 움직이며 낮게 흥얼거리시던 아버지의 그 서투른 옛노래를 가만히 듣곤 하던 기억이 난다.
산홍아 너만 가고 나만 홀로 버리기냐
너없는 이 세상은 물없는 사막이다, 불꺼진 항구드라
혹은
산이라면 넘어주마, 물이라면 건너주마
화류계 가는 길은 산길이냐, 물길이냐
흑싸리 한 짝에도 잊지 못할 내 사랑아
아버지가 그 무렵 왜 그처럼 서글프고 팍팍한 노래, 어린 내겐 생각하기조차 두려운 무언가 농염하고 기이하고 삭막한 뜨내기 노래를 흥얼거리는지 전혀 알 길 없었다. 보도연맹 이후의 허탈감, 패배감 때문이었을까? 다만 열심히 일하시는 모습이 내게는 커다란 안정감을 주었고 특히 나를 돌아보며 씨익 웃으실 때는 그것이 바로 다름아닌 꿈결같은 행복이었다.
고생하다 안정되면 흔히 그러는 것인가. 나는 자주 앓았다. 노상 감기가 떠나지 않았고 심한 배앓이로 그 쓰디쓴 육모초가 단골이 되었으며 이질백피에 걸렸을 땐 엿을 고아 넣은 막걸리를 마시고 대취하여 온종일 해롱해롱, 학교 친구들과 온동네의 웃음거리가 되기도 했다. 하나 아무리 아파 죽을 지경이 돼도, 어른들의 극구만류에도, 그여이 가방 들쳐메고 나섰으니, 일 년 내내 하루 한 시간도 빠짐없는 개근이요 전학년 우등이었으니 왜?
기억한다. 불행한 형편의 어린이에겐 누구나 있는 남모르는 행복에의 목마름. 모처럼의 오붓한 안정을 가져다준 부모님께 보답하려 애쓰는 마음, 기억한다. 정오의 운동장 뜨거운 땡볕 아래 몇 차례나 졸도하여 양호실에서 깨어났을 때 그때마다 천장과 벽과 햇빛과 친구들과 선생님 얼굴이 헌데 얽혀 빙빙 돌아가는 어지러움 속에서도 어머니 아버지가 함께 계신 그 화안한 작은 방을 떠올려 확인하고는 안도의 한숨과 함께 흡족해 미소지었던 일들을 똑똑히 기억한다.
그리고 그 무렵 잊을 수 없는 오대현 선생님. 그때에도 나는 반장이었는데 조회 때만 되면 그놈의 ‘앞으로 나란히’ 소리하기가 죽도록 싫어 윗운동장 돌벼랑 위에 패어있는 나의 소감(小龕)으로 달아나버리곤 해서 몇차례고 불려가 꾸중 또 꾸중. 우스운 이야기가 하나 있다.
교실 바로 내 앞자리에 부반장이던 계집애 ‘똥굴이’와 까불기로 유명한 말상계집애 ‘촉새’가 앉았는데 어느 날 둘이서 한참을 뭔가 수군대더니 이윽고 내게 몸을 돌리고 가라사대
“반장하기 싫으면 나하구 바꾸자”
나는 파아란 반장계급장을 ‘똥굴이’에게 얼른 줘버리고 말았다. 그 일로 또 불려가 지청구!
그때 선생님이 이런 말씀을 하셨다.
“의무라는 것이 있다. 제가 아무리 하기 싫더라도 여러 사람 위하는 일이라면 할 수 없이 해야 하는 것이 의무다. 대통령도 자기가 좋아서 하는 것이 아니라 국가와 민족을 위해서 할 수 없이 하는 것이다. 모르겠느냐?”
내 눈은 그때 나의 손, 울퉁불퉁한 그 괴상한 손 위에 가 꼼짝달싹 않고 거기 멈춰 있었다.
선생님 왈
“주먹을 꽉 쥐어봐라. 사나이답게 한번 힘껏!”
힘껏 쥐어보려 했다. 애써 보았다. 그러나 웬일일까. 도저히 힘껏 쥐어지지를 않는다. 애쓰면 애쓸수록 목이 타고 식은땀이 솟고 온몸이 부들부들 떨렸다. 얼마를 그러고 있었을까. 이윽고 선생님 손이 천천히 내 머리를 쓰다듬었다. 그뒤부턴 선생님이 직접 구령을 하셨다. 나는 지금도 선생님을 결코 잊지 못한다. 이 글을 쓰고 있는 지금 내 가슴에, 눈에 뜨거운 눈물이 가득 차 오른다.
학교가 파한 뒤 꼭 학교 앞 만화가게에 들러 만화를 보는 내 버릇이 어머니와 선생님 사이에 문제가 되었다. 물론 그때 만화는 지금과는 전혀 딴판. 지금 기억나는 것만으로도 참 슬프고 진지하고 훌륭한 내용들이 많았다. 기억하는 분도 있을지 모르겠다. <낮에 나온 반달>이니 <짱구박사 소동기>니. 하나 마음을 거기 너무 뺏기지 않느냐는 게 어머니의 걱정. 여기에 대해 선생님은
“영일이는 지금 혼자서 아주 높은 공부를 하고 있습니다. 만화는 그냥 끄트머리일 뿐이지요. 걱정 마십시오”
선생님은 얼굴이 다부지고 눈이 크고 작은 키에 몸집이 단단한 분이다. 그리고 노래가 무척 서투른 분이다. 떨림이라곤 아예 없는 냅다 내지르는 된목에 뚝뚝 부러지는 소리로, 똑 행진곡모양 부르시던 그 무뚝뚝하기 짝이 없는 가을 노래를 나 얼마 전까지만 해도 간혹 술에 취하면 깊은 그리움에 젖어 혼자서 부르다 낄낄 웃다간 또 소리없이 울곤 했다.
기러기 훨훨 날아간다
가을밤 달은 명랑한데
창공에 높이 짝을 지어
저어멀리 날아간다
오대현 선생님은 6.25직후 부역자로 총살당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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