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분명 열 살까지 오줌싸개였다. 이상하고 재미난 꿈을 신나게 꾸다가 그만 싸버리고, 오줌이 마려운데도 잠을 깨기 싫어서 조금만 더 조금만 더 하다가 그만 싸버리고, 짜게 먹고 물켰다고 싸고, 불장난했다고 싸고, 곤하다고 싸고.
“또 쌌다. 또 쌌어!”
‘또’라는 소리가 쾅 천둥치고 얼룩덜룩 지도그린 요가 마당에 들려나가 밝은 햇빛 아래 선명히 드러나며 온동네에 알려질 때에 나는 이미 그 자리에는 아예 없는 사람.
오늘만은, 오늘만은 하고 몇 번이고 다짐 다짐하며 잠들었다가 눈을 막 떴을 때 아랫도리에 느껴져 오는 흥건함, 질퍽함, 아 그때의 그 황량한 절망감!
내 자신이 한없이 미웠다. 욕도 많이 먹고 모욕도 많이 당했다. 주로 게으름뱅이라는 거였다. 하기야 내가 게으른 건 사실이지만 내 스스로도 무척 애를 썼으나 모두 허사!
잠들기 전에 그것을 실로 묶고 있는 어른들 얼굴을 볼 때나, 아침에 저려오는 아픔을 견디며 가득찬 오줌으로 똑 개구리 배때기처럼 뽈록 부풀어오른 그 꼬락서니를 들여다 보면서 킬킬대는 어른들 얼굴을 볼 때 내가 느낀 것은 무엇이었을까? 비굴? 분노? 어른들은 수치심으로 버릇을 잡으려 했다. 하나 그게 과연 바른 일이었을까.
열 살 나던 설날 아침. 큰집에 소금 얻으러 갔다 물벼락을 맞고 그 높은 토방마루 위에 덜덜 떨면서 커다란 키를 뒤집어쓰고 엉엉 울고 앉아있는 발가벗은 내 모습이 선연히 떠오른다. 식구들은 방 안에서 아예 내다보지도 않은 채 설빔을 하고 있었고 이제 막 떠올라 사방에 퍼지기 시작한 눈부신 아침햇살에 벽에 비친 내 그림자! 키를 뒤집어 쓴 벌거숭이의 괴상한 그림자! 하하! 나는 왜 늘 내 그림자에 그렇게 관심이 많았을까? 이상한 일이다. 하여튼 그날 그랬다. 하나 서운한 느낌이 없고 오히려 왠지 미더운 느낌이 드는 것 또한 이상한 일이다.
실로 칭칭 묶는 것과는 전혀 다른 참으로 이상한 어떤 느낌. 어째서 옛 어른들은 그런 때 키를 씌웠던 것일까? 필경 단순한 망신이 아닌 깊은 까닭이 있을 터.
키!
키는 체라고도 한다. 그것은 알곡을 까불러 쭉정이와 알갱이로 가려내는 것. 그렇다면 키는 오줌싸개에게 있어 성인식(成人式)의 뜻을 갖는가. 똥오줌을 스스로 가려야 어린이를 면한다. 똥오줌이 어디 단순히 똥오줌만인가! 그것은 생리이면서 또한 심리.
아, 아제야 알겠다. 병아리가 알에서 깨어나오듯, 매미가 허물을 벗듯, 인간은 성인식(成人式)을 치른다. 키는 바로 어린 껍질을 벗어던지는 알맹이의 쓰라린 홀로서기의 기준! 그래서 어른들이 그리 매정하게 욕을 하고 창피를 주고 물벼락을 안기며 키를 덮어 씌우는 거다. 성숙하게 사리분별을 하라는 것. 껍질을 벗고 단호하게 속알맹이가 튀어나와야 한다는 것.
하긴 그날 이후 나는 밤오줌은 그쳤다. 그러나 그렇다면 더욱 큰 일.
스물이 넘어서도 술에 만취하면 남의 집 이부자리에서 오줌싸기가 한두번이 아니었으니, 고인이 된 김현의 목포집에서도, 원주서 고철장사하던 친구 나코빨갱이 집에서도, 서울의 내 좋아하는 선배 악어형 집에서도 그만 크게 몇 차례나 실례했으니.
술이 어디 단순히 술만인가! 술은 곧 마음이다. 20대의 내 마음이 껍질을 채 훌훌 벗어버리지 못하고 홀로 우뚝 선 어른이 되지 못한 채 쭉쟁이채 질질거리며 이리저리 방황하고 있었던 탓, 분명하다.
키는 엄중한 시련이요, 냉엄한 심판이기도 하다. 결코 어리광이나 변명이나 자기기만이나 유보가 통하지 않는다. 1967년부터 1969년까지의 역촌동 결핵요양원에서 그 사활을 결판내는 피투성이의 투병, 키였다. 그 후로는 술에 만취해서도 아무데나 오줌을 싸지는 않게 되었다.
그러나 또한번 오줌싸개가 단순히 오줌싸개만인가! 정신의 오줌싸개, 삶의 오줌싸개, 더욱이 유년 이후 거듭된 억압과 좌절 아래 일그러지고 주눅든 내 마음이 나의 내면과 세상에 대해 조금이나마 깊이 깨닫고 넓게 열리기까지엔 끝없이 냉정한 욕설과 매서운 시련과 가차없는 물벼락과 거듭거듭 크고 무서운 키를 덮어써야만 했던 것이다.
허나 쉰하나 된 지금까지도 나는 어떤 의미에선 역시 질질거리고 있다. 거듭거듭 뒤틀리는 좌절의 관성. 나의 운명이리라. 그래 나는 아주 속편하게 이렇게 정리한다.
‘인간은 영원한 오줌싸개
키는 죽을 때까지 쓰는 것’
***小龕**
대성도에서 연동으로 넘어오는 터진목은 큰 바위산을 남포를 터서 깨트린 애로다. 길 양쪽에 크고 높은 바위가 솟아 있는데 영산강쪽 바위 중간에 움푹 패어 들어간 소감(小龕)이 있다.
그 무렵 나는 터진목을 지날때마다 그 소감(小龕)을 유심히 올려다보곤 했다. 왠지 모르나 높은 데에 움푹 들어가 있어 아무나 쉽게 범접할 수 없는 거기, 깊은 평화가 있을 것 같았다. 때로 거기, 촛불이 켜져 있을 적도 있고 비나리를 했는지 음식그릇과 흰 종이들이 흩어져 있기도 했다. 또 때로는 문둥이가 시커멓게 웅크린 채 꼼짝않고 잠을 자기도 했다. 마치 돌부처가 모셔진 것처럼 거기에 평화가, 알 수 없는 다소곳한 깊은 평화가! 신작로 옆이어서일까? 한 번도 올라가 본 적은 없다.
그 대신 나는 다른 곳에서 나의 소감(小龕)을 찾아냈다. 산정학교 윗운동장 뒤에 깎아지른 돌벼랑이 있는데 거기 높은 위쪽에 터진목과 똑같은 크기의 소감(小龕)이 패어 있었다. 올라가기가 퍽 힘들고 위태로웠으나 나는 수없이 실패하며 또한 수없이 시도하여 마침내 올라가는 비결을 터득했다. 거기 참으로 나의 평화가 있었다. 외로울 때 서러울 때 괴로울 때 매를 맞고 쫓겨났을 때는 반드시 가는 곳. 그곳은 아무도 올 수 없는 나만의 자리였다. 거기 탱감쳐앉아 허리 곧추세우고 맞은 편 솔개산을 건너다보며 무슨 생각을 했을까? 그러나 아무 생각도 하지 않았다. 거기 있는 것은 그저 자그마한 깊은 평화 그것뿐이었다.
나는 그때 이미 작은 애기 돌부처였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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