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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지하 회고록 '나의 회상, 모로 누운 돌부처' <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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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지하 회고록 '나의 회상, 모로 누운 돌부처' <37>

남자의 성(性)의 뿌리는 어머니에게 있다. 어머니의 희고 보드랍고 풍만한 젖가슴을 기억할 수 있는 사람은 행복하다. 그의 마음의 여성은 희고 보드랍고 풍만할 것이므로 그래서 그의 마음 역시 희고 보드랍고 풍만할 수 있을 것이므로.

내겐 기억이 없다.
내가 기억하는 젖가슴은 어머니가 아니라 아직 여물지도 않은 이모나 고모의 메마른 젖가슴이요, 훗날 침침한 뒷골목 새빨간 불켜진 방에서 짙은 혐오감, 짙은 증오에 맞닿은 육욕으로 주물러댄 늙은 창녀의 축 늘어진 불모(不毛)의 젖가슴뿐이다.

젖가슴이 어디 젖가슴인가? 이것은 사랑 이야기다. 한 여자에 대한 한 남자의 사랑은 스물이 되어 어느 날 보랏빛 라일락 그늘에서 갑자기 싹트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그의 아기적, 걸음마를 시작할 적에 벌써 혼 속에서 싹이 돋고 그때 이미 그의 사랑의 운명은 결정된다. 유년기의 사랑의 결핍이 사람을 어떤 황량한 사막, 어떤 컴컴하고 거칠고 잔혹한 삶 속으로 몰고 가는지는 이미 널리 알려진 사실이다. 유년의 사랑은 그만큼 중요하다는 것. 하나 나는 그것을 나의 지나간 삶을 철저히 되돌아보게 된 최근에 와서야 비로소 뼈저리게 깨닫기 시작한다. 참으로 만각(晩覺)이다.

사랑은 부드러운 것이라 한다. 그리고 창조적인 것이라 한다. 부드럽다면 그것은 필경 음양의 균형에서만 솟아오르는 신비한 능력이다. 내 안에서 천지와 부모가 화해하고 합일할 때에만 참된 사랑은 싹이 트고, 싹이 트는 것 그것이 곧 창조일 것이다. 평생을 일관한 내 고통의 뿌리는 내안의 천지와 부모의 불화, 분열이었고 내 갈증의 내용은 내 안의 천지와 부모의 따뜻한 화해, 창조적인 할 일이었다.

떠오르는 형상이 하나 있다. 감나무, 잿빛 겨울하늘을 배경으로 까마귀가 파먹고 남긴 감 몇 개 덜렁 달린 을씨년스런 검은 감나무등걸 하나.
뻘바탕 한복판에 있는 낮은 돌담 속의 자그마한 봉제 삼촌네 초가집. 하염없이 그 감나무를 쳐다보고 있던 날의 기억이 떠오른다.

그 무렵 아버지는 마침내 수배가 풀리고 객지에서 돌아와 목포에서 일을 하시기 시작했고, 우리는 그때 그집에 세들어 살고 있었다. 오랜도록 헤어졌던 부모님이 함께 계시는 그 나날, 그것이 어찌 내게 지극한 행복이 아닐 수 있었겠는가! 집안에 통 관심이 없기로 유명한 아버지가 저녁이면 찬거리를 사들고 들어오시곤 했고 세 식구 둘러앉아 밥상은 오붓하기 그지 없었다. 한번은 아버지가 큰 룩색에 가득 빠알간 피문어를 몇죽이나 가져 오셨는데 그것을 잘게 잘라 간장에 조려서 두고두고 먹었던 일, 그리고 그 독특한 맛이 지금껏 잊히지 않는다.

그런데 그날. 그 큰 싸움. 무섭고 무서운, 기억하기조차 싫은, 참혹한.
“싸우지 마쇼야. 싸우지 말어라우”
울부짖던 내 새된 목소리가 지금도 귀에 쟁쟁히 울린다. 그 단란하고 오붓한 모처럼의 행복이 무참히 깨어져나가고 있었다. 울며불며 하소연했고 무릎을 꿇고 한없이 두 손 비비며 빌고 또 빌었으나 소용없는 일이었다. 아버지는 훌쩍 시내 쪽으로 가버리셨고 어머니는 또 외가로 가버리셨다.

어지러진 방안 벽에는 원앙 한 쌍 수놓은 꿈결같은 횃대보가 덩실하니 결려있었다. 활짝 열어젖혀진 문 밖에는 우중충한 잿빛 겨울하늘, 을씨년스런 감나무 검은 등걸이 거기 있었다.
이튿날 새벽 큰집 안방 곰보할매 물레잣는 소리에 눈을 떠 할매 곁에 그 속에 흔들흔들 이상한 것이 보였다. 빙빙 돌아가는 물레 안에서 아버지와 어머니가 손에 손을 잡고 하얀 이를 드러내고 마구 웃으며 흔들흔들 자꾸만 자꾸만 돌아가고 있었다.

창호지문엔 파아란 새벽빛, 방 안에는 호롱불 새빨간 불꽃봉오리!
끔찍한 과거는 잊어버리려고 애를 쓰면 또 그런대로 잊어버리게 되는게 사람인가 보다. 그래 오래도록 새카맣게 잊고 있었는데 그런데 지금 끔찍한 기억 하나가 뭉글뭉글 떠오르기 시작한다.

여덟 살 때, 컴컴한 어느 부엌 구석이다. 나보다 큰 놈들이다. 셋? 넷? 손으로 입을 틀어막히고 팔은 뒤로 비틀리고 꼼짝달싹 못하게 뒤와 옆에서 겹겹으로 껴안고 있다. 바지가 벗겨지고 가느다란 회초리가 그것을 끝없이 후려친다. 아프다기보다 몹시 뜨거웠고 몸속에 시뻘건 피가 줄줄 흘러내리는 것 같았다. 그런데 왜 그것이 자꾸만 꼿꼿해지고 곧추서는 것일까? 낄낄거리는 웃음소리 웃음소리. 머리가 욱신대고 어지러웠다. 밑모를 절망! 눈앞이 노오래지며 나는 끝내 자지러져 버렸다. 축축한 부엌바닥에 너부러져 혼자 그렇게 얼마나 있었을까?

슬픔? 노여움? 수치심?
잊어버리고 싶은 악몽, 그러나 지울 수는 없는 깊은 상처였다. 그 뒤로부터 내겐 틈만 나면 끊임없이 그것을 잡아 비트는 해괴한 버릇이 생겼다. 욕도 많이 먹고 매도 숱하게 맞았지만 아무 소용이 없었고 성이 나서 머큐로크롬까지 바르는 일이 여러 번 있었는데도 한참 뒤까지 그 버릇은 내내 잡히질 않았다.

성(性)에 대한 나의 기묘한 수치심과 괴팍한 호기심은 이율배반, 성기에 대한 오래고 깊은 열등의식과 그것에 대한 어두운 색정적인 집착의 모순의 뿌리가 바로 이 사건에 있는 것 같다. 어릴 때 한번 일그러진 성(性)에 대한 관념은 사람의 성격에 복잡한 그늘을 만든다. 그 그늘을 일러 불행이라고 하지 않는가! 갈수록 이해하기 어려워지는 인간이란 이름의 괴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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