엄동 눈보라 아래 다 죽은 듯 나무등걸 속에서, 뜨거운 여름 폭양밑에 숨죽인 저 조용한 잎새 속에서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지 알 수 있는 사람은 별로 없다.
억압은 없어져야 한다. 그러나 원천적으로 없어져야 한다. 억압은 그 억압으로부터의 해방의 싹을 틔우는 법이다. 억압은 억압당한 자의 마음속에서 영그는 삶과 세계에 대한 그 독특한 체험 안으로부터 터져나오는 그 나름의 다양한 자유의 길을 따라서 없어져야 하는 것이다.
천여년에 걸친 도가(道家)의 장인(匠人)들과 연금술사(鍊金術師)들의 그 심방(心房) 안에서 도무지 무슨 사건이 일어났는지 쉽게 알 수 있겠는가?
그 무렵 내가 희미하게 느끼기 시작했던 장인(匠人)의 그 쓸쓸한 자유! 하나 그 길마저 막혀버렸으니 나의 어린 시절도 어지간히 북쪼가리는 없었던가 보다.
할아버지가 귀한 연장 가지고 부잡떤다고 무서운 눈을 부릅뜨고 몽둥이를 들고 쫓으며 천지진동하게 고함고함을 질러대다 아이를 치면 안된다는 곰보할매의 단호한 저지에 멈칫하기 일쑤였고 역시 어머니는 줄기차게 “연장만지면 가난하다” 소리로 나를 끝끝내 세뇌시켜 기술자의 길마저 단념하게 했으니!
가끔 아내가 날더러
“당신은 전기나 기계등속은 아예 손도 못대는 백면서생!”
그런다. 난 그저 쓸쓸하게 웃고만다. 허나 아내여! 그렇지만은 않다네! 그대는 내 손에, 내 손 속에서 살아있을 내 마음의 역사 속에 깊이깊이 질린 단단한 저 빗장이 숱한 시간을 숨죽여 울며 스스로를 꺽고꺽고 또 꺽으며 넘어온 내 어린 시절의 남모르는 눈물로 얼룩져있음을 이해할 수 있겠는가? 나는 솔거같은 화가가 되고 싶었고 또 그 뒤 자기만의 외로운 세계를 지닌 기술자가 되고 싶었다네! 결코 요모냥 요꼴 먹물 냄새나 풍기는 시인 나부랭이가 되고 싶진 않았다네!
큰집 식구들은 어떤 경우에도 그 존재 자체가 이미 내겐 구수한 삶의 향기다. 큰집에 전해내려오는 우스운 이야기 몇토막.
돈수 할아버지와 일만이 할아버지 형제 이야기. 돈수란 분은 아주 뾰족하고 영악해서 제 먹을 것은 보리 한 알도 악착같이 챙기는 위에 또 노름까지 잘해 그리 번 돈으로 땅까지도 샀다. 한데 일만이란 분은 좀 헤벌레하니 모자라서 분명한 제 땅 놔두고 남의 땅 소작 부쳐먹고 제집 비워두고 남의 집 머슴방에 가 새우잠 자기 일쑤.
밥먹을 때 돈수 양반이 하늘을 가리키며 ‘쩌그 신선봐라’하면 한없이 하늘만 보고 있는 사이에 맛있는 것 다 주워 먹어버리고, 말까지 어더더한 일만이 할아버지를 돈수란 분이 이리 맨날 속여먹은 이야기를 하며 일만이 할아버지 멍청함을 두고 어른들은 배를 잡고 웃었지만 난 웃을 수가 없었다. 어쩐지 그 양반이 불쌍하고 너무 좋아서다. 동병상련?
작은 숙부의 그 유명한 식탐. 일제말기 식량이 귀할 때다. 늘 입이 궁금하고 출출해 있던 터에 하루는 아버지가 똑 보리개떡같이 맛하나 없는 밀빵을 한 부대쯤 잔뜩 사가지고 들어가 허리띠 풀어놓고 먹어대기 시작했다. 네 형제가 눈에 불을 켜고 허겁지겁 먹어대는데 입이 미어터지게 한움큼 물고 그 위에 두 손으로는 잔뜩 빵을 움켜쥐고서 작은 숙부 웅얼웅얼 가라사대
“윔메, 입이 두 개였으면 좋겄네.”
하도 밉살스러워 세 형제가 한꺼번에 우르르 달려들어 작은 숙부를 방바닥에 꼼짝 못하게 눕혀놓고 입에다 덩어리 덩어리 빵을 갖다 억지로 막 쑤셔넣으며
“아나 실컷 먹어라, 아나 입 두개!”
그길로 탈이 나서 시름시름 몇달을 고생했다는 이야기. 지금 암태 사는 숙부 맹복씨가 큰집에서 학교를 다녔는데 그 양반 밥먹을 때 깨깡 이야기다. 일제말 궁핍하던 때라 반찬이 간장밖에 없었더란다. 모두들 그나마 달게 먹고 있는 판에 깨깡부리느라 숟가락을 달그락달그락 놓았다들었다 놓았다들었다, 간장을 쬐끔 찍어먹어 보고는 오만상을 다 찡그리며 왈
“오옴메 간장이 짜다야.”
아무리 마음이 추울 때도 이 이야기들만 생각하면 내 마음에 싱그레 웃음기가 돌곤 한다. 가난이란 다만 결핍뿐만이 아닌 것이다.
정환 형이 사람들 보는 데선 날 외면했지만 마음에서까지 아주 잊은 건 아니었다. 언제였던가. 벚꽃 눈부시던 날, 형은 나를 몰래 불러내 벚꽃 만발한 산정리 도자기 만드는 저 유명한 행남사에 데려간 일이 있다. 그 무렵 형은 생활 때문에 간간이 행남사에 가 다기나 술잔 등에 난초며 국화 따위를 그려넣어주곤 했는데 그날이 바로 그날이었다.
창밖엔 화사한 벚꽃구름, 유리창으로 쏟아져 들어오는 투명한 햇살, 쌔하얀 그릇들 위에 그리인 깔끔한 화초며 앙증스런 세형산수들, 정갈한 작업대. 그 방, 그 방이 영 잊히지 않는다. 거기 떠억하니 버티고 앉아 흰 옷 입은 예쁜 여공들에게 둘러싸여 전문가 나름의 권위와 익숙한 몸짓으로 척척 그림을 처리하는 형이 어찌 그리도 돋보이던지!
“영일아, 실수해도 괜찮으니께 너도 하나 해봐라.”
순간 나는 허공에 붕 떠버렸다. 내가? 저것을? 저 예쁜 그릇 위에 그림을?
아아 그 순간을 나는 영영 잊을 수 없다. 얼굴이 빨갛게 달아 꽁무니 빼려는 내 손을 꽉 붙들어다 의자에 앉혀놓고 형은 내 앞에 초벌그릇과 붓, 빛깔 등을 갖다놓으며 등을 툭툭
“자아 자아 실수해도 괜찮으니께.”
무슨 정신이 어찌어찌 무엇을 그렸는지 나는 모른다. 희미하게 떠오르는 자그마한 그림하나. 투명한 샘물속에 담긴 사르르 흔들리는 붉은 다리. 그것은 내가 그린 것인가? 아니면 그릇에 이미 그려져 있던 것인가?
형이 만족하듯 빙그레 웃고 있었고 처녀들이 옴메옴메를 연발, 방실방실 웃으며 내 어깨를 끌어안고 머리를 쓰다듬고 그랬던 것만 생각난다.
그 뒤 어느날 해설필 무렵 부줏머리 동구섬 갯가. 형은 물에 들어가 창질로 큰 해파리를 낚아왔다. 가지고 간 초간장을 찍어 오돌오돌오돌 둘이서 얼마나 맛있게 먹었는지! 하나 그 보다도 섬건너 뻐얼건 흙어덩 밑에 노을 발에 타고 있던 상엿간의 음산한 모습. 밤이면 웃음소리가 나와 바다로 들어간다는 상엿간의 잊을 수 없는 그 기이한, 기이한 모습!
6.25 때다. 형은 아마 미술가 동맹에 속해 있어서 의무적으로 포스터를 그렸던 것 같다. 하루는 날 몰래 불러내 시내 부두근처 사쿠라마치 뒤쪽 목포여중 작업장에 데리고 갔다. 밀대모자를 쓰고 큰 낫으로 한무더기 벼를 베어들고는 활짝 웃는 농부의 거대한 얼굴. 볏단의 나락알을 하나하나 그려넣는 정밀화였는데 내 몫은 그 나락알에 일일이 노오란 빛깔을 칠해넣는 일이었다.
한데 그날 막상 강렬하게 남아있는 기억은 그림이 아니라 곁에서 시종 양철냄비 두들기는 소리로 떠들어대던 여학생 한 사람이다.
“반동년 한 마리를 내가 잡았당께. 울고불고 사정하고 지랄하는디 그대로 무자비하게 내무서로 넘겨부렀제, 잉. 항도여중 그 강자년 안 있냐 그년, 그 판에도 향수냄새가 나더랑께. 그 뿌르조아 반동 퇴폐분자년!”
열 여덟살 쯤? 열 아홉살 쯤? 자그마한 키, 가파른 몸매, 창백한 이마위에 흘러내려 칙칙하게 검은 머리카락, 꽉 다물어진 입. 누르끼리한 눈바탕에 핏발이 버얼겋게 서 있었다. 그리고 왼손에 칭칭 감은 머큐롬 묻은 흰 붕대! 왠지 모르나 6.25 전후 학생들 사이에 대유행이었는데 그 핏빛으로 불그레 머큐롬 배어나는 쌔하얀 붕대가 내 눈에 선연히 남아 있다. 마치 죽음의 냄새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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